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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홍 May 15. 2024

나의 파랑새 찾기

'充'과 '滿'에 대한 단상



 욜로(YOLO), 워라밸을 꿈꾸고 있는가.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공기놀이, 구슬치기, 땅따먹기. 놀이터도 좋지만 맨바닥도 불사한다. 그들의 놀이는 흡사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내는 기적에 가깝다. 그네를 타고 철봉에 매달리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누가 보아도 쓰임이 분명한 디자인의 미끄럼틀은 그들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 용도가 불분명해진다. 경사면 난간을 붙잡고 기어오르는가 하면,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올 법한 폼을 잡고 아슬아슬 곡예를 펼치기도 한다. 그러다 엉덩방아 찧기는 예삿일이다. 말도 나오지 않는 아픔에 눈물을 글썽이는 일은 무용담 축에도 끼지 못한다. 외할머니의 표현을 빌려 세-상 지앙스럽다(?). 그들은 늘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며, 키즈카페나 PC방 등 운신의 폭이 더욱 넓어진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초등학생이 유치원생을, 중학생이 초등학생을, 고등학생이 중학생을, 대학생이 고등학생을 보며, 좋을 때라고 한다. 그런 그들을 보고 우리는 말한다. "좋을 때다." 언제부터인가 삶은 늘 부족하고 불만투성이다. 온종일, 학창 시절의 ‘미친개’보다 더 ‘미친개’ 같은 상사에 치이고 밉살스러운 동료와 보대낀다. 유난히 하루가 길다 싶은 날이면, 집에는 항상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내가 기다리고 있다.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온갖 번뇌가 밀려온다. 나도 모르게 철학자가 된다. 내가 예민해서가 아니다. 사회생활이라는 곳에 내던져진 ‘어른이’들의 현실이다.(여기서 말하는 사회생활은 먹고살기 위해 나를 내던져야 하는 모든 생활을 가리킨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악착같이 욜로(You Only Live Once)나 워라밸(Work-life balance), 혹은 키덜트(Kidult) 같은 새로운 숨줄을 찾아 나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늘 삶의 "만족"을 추구한다.




Ⅰ "만족"을 위한 "채움"



      ‘가득 차다’라는 의미를 가진 한자로 흔히 充(채울 충)과 滿(찰 만)을 든다. 充(이하 '충')은 가득하거나 가득하게 함을 뜻한다. 너무 가득해서 무엇인가를 막거나 가린다. 그래서 번잡하다. 혹은 비대하게 살이 찌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滿(이하 '만') 역시 가득하고 가득하게 한다. 때로는 거만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가득 찬' 것은 비슷해 보인다. 그렇다면 "충족"과 "만족"은 같은 말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충'은 사람(儿 어진사람 인)이 자라는(育 기를 육) 모양이다. 반면 '만'은 물(水 물 수)이 그릇 혹은 두 개의 항아리(㒼 평평할 만)에 가득 찬 모습이다. '충'은 성장의 "과정"이고 '만'은 이미 가득 찬 "완성"인 셈이다. 그러니까 100이라는 도달 지점을 두고, 그것을 향해 10, 20, 90 채워가는 과정은 '충'이고 다 채워 100인 상태는 '만'인 거다.


      우리는 살면서 만족이라는 도달점을 향해 끊임없이 내달린다. 한 번에 도착하면 좋으련만 매번 욕심 같지는 않다. 이럴 경우에는 지속적인 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칫 결핍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결핍이라는 것은 중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시작이야 어찌 됐든 그것이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일중독, 운동중독, 탄수화물중독, 하다못해 영화 제목으로 인간중독이라는 말도 나왔다. 사물이든 동물이든 사랑 따위의 감정이든, 그게 무엇이든 충족되지 않으니 만족하지 못한다. 채워지지 않으니 갈망한다. '충'은 허기와 같다. 먹거나 안 먹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얼마나' 먹느냐의 차원이다. 대충 달래는 데 급급하면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상태이길 원하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제대로 충족되지 않으면 이것은 언제고 말썽을 일으킨다. 의미 없는 폭식이나 거식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해!"


당신은 후회할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급하지 않은


이야기 속의 파랑새, 그리고 당신의 파랑새



“자,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우리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해요.”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정들었던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었어요.

빵, 불, 물, 우유, 사탕, 개, 그리고 고양이마저도 슬퍼했어요.

“아직 파랑새를 못 찾았잖아요. 요술쟁이 할머니께는 뭐라고 하죠?”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걸로 된 거예요.”

빛의 요정이 빙그레 웃었어요.


      벨기에의 극작가이자 시인,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의 <파랑새(L’Oiseau Bleu)>에서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파랑새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결국 파랑새는 행복이며, 행복은 우리 곁에 있다는 다소 교훈적인 이 동화는 오늘날의 병리적인 인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현재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여 흥미를 잃은 채 미래의 막연한 행복만을 바라는 병적인 증상. 일명 파랑새 증후군이다. 여기서 방점은 ‘막연한’에 찍혀있다. 동시에 이를 위한 어떤 움직임도 없다. 그래서 부정적이다. 아름다운 미래에 대해 상상하고 확신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의 삶과 충돌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다. 이 과정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지식 안에서, 한 번뿐이다. 그래서 현재의 나는 중요하다. 그래서 행복해야 한다. 미래를 위한, 혹은 남을 위한 희생도 좋으나 이것이 현재의 내가 불행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당장 "만족"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족을 위해 채워 나가자. '준비'의 의미가 아니다. 하루하루 당신이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하라는 말이다. 그 선택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만족을 주리니.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우리는 최선을 다 했다. 그걸로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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