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나'-유실물 저장 목록이 폐기되기 전에

by 들숨

1.

들판에 꽃들이 심상치 않다

다가가 보니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제각각 이어야 할 꽃들이

하나같이 같은 색을 띠고 있다

처음 계절은 이랬다

꽃과 나비가 서로 동등하게 주고받는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고

꽃에게 유리한 조항이 훨씬 많았다

약삭빠른 나비는

꽃이 땅에 묶여 날 수 없음을 알아차렸고

입에 물고 있는 빵조각을 차츰 줄여나갔다


나비는 그의 입맛에 맞는 색깔을 슬며시 제시했고

커진 빵을 본 꽃은 순순히 그의 제안에 응했다

교묘한 나비의 길들이기 효과는 대단했다

소외에 대한 두려움과 욕망에 굴복한 꽃들이

흔들리고 휩쓸려 스스로 의지를 꺾어 앞다투어 색깔을 바꿨고

속셈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색깔을 묵묵히 지키는 꽃은

그들의 신념을 흐리게 하고 단합을 방해한다는 미명아래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부패한 빵으로 들판이 시들고 기울고 어지러울 때마다

쓸어내고 도려내 바로 일으켜 세운 것은

오로지 의지를 꺾지 않고 힘겨운 사투를 벌인

자유로운 꽃들의 희생이었다


어른들은

어린 꽃들이 타고난 색깔에 대해서 벙긋이라도 할라치면

맹목의 빵을 작은 입안에 뭉개 넣었다

선택을 빼앗기고 물들어버린 어린 꽃은

몰래 잠재된 눈빛을 꺼내

독특한 색깔을 걸친 꽃들을 훔치다가도

당장 커다란 빵 앞에서는

배고픈 이방인의 누추함을 절레절레 털어냈다


2.

처음 나비의 친절했던 제안은

점차 일방적인 지시가 되었고 여러 조항들이 추가되었다

꽃을 활짝 피우지 않거나 색깔을 제대로 내지 않으면

부스러기의 반을 줄인다거나

제공하는 부스러기의 양을 계절마다 다시 정하고

받을 수 있는 기간도 매번 따로 정하기로

아픈 꽃잎은 언제라도 치료받을 수 있지만

회복되는 동안 부스러기는 잠정 중단된다는

등등등

큰 빵을 가진 꽃들은 작은 조각들의 눈을 피해

그의 야욕을 눈감아 주었고

대가로 밤에도 비밀스러운 꽃을 피워

한층 더 빵빵해졌지만

주위의 꽃들이 같은 들판에 뿌리내린

모두가 하나라는 성가신 진실을 놓아버렸다

더 큰 빵을 뜯으려는 탐욕과 집착에 사로잡혀

약한 꽃을 꺾고 강한 꽃에 꺾이는

들판의 매일은 치열하고 은밀했다

전장에 소문 없는 꽃들의 주검이 썩어 가는

형형색색의 악취가 즐비하다


타고난 색깔을 간직한 꽃들이

황량한 언덕에 앉아

작지만 색다르고 맛깔스러운 빵을 든 나비를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아름다운 선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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