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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 보석 Dec 05. 2022

사추기(思秋期)


사추기(思秋期)

 

 

                           노란 보석

내가 길을 잘 못 들었나

내가 가려던 길은 이 길이 아니었는데



정신없이 오르느라 몰랐는데

오르면 아름다운 경치만 있을 줄 알았는데

안개가 자욱하니 보이지 않네

길을 잘 못 들어 엉뚱한 곳에 온 걸까

그래도 내가 걸어온 길인데

되돌아갈 수도 없고



올라온 길 뒤돌아 보니

황혼 벌써 타고 있는데

고갯길 굽이굽이 사연도 많았구나

저 먼 길 몇 번을 포기 했던가 

하지만 그래도 예까지 왔구나

서두르다 돌부리에 차여 넘어지기도 했고

칼바람 부는 눈 내린 광야에서 홀로 떨기도 했고

비바람 태풍에 겁 없이 맞서기도 했지만

험난한 길에도 희망의 등댓불은 보였지

소낙비 후 펼쳐진 무지개 위에 꿈을 채색하

눈 부시게 맑고 푸른 날엔 춤추고 노래하면서

불타는 사랑으로 환희도 맛보았지만

이별의 쓰라린 상처에 울기도 했지

그래도 행복을 수시로 맛보고

감사의 기도도 드렸지

아쉬움도 있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했으니까

어찌 되었든 예까지 올라온 내가 대견하다



꽃 피고 새우는 꿈 많은 봄날도 있었고

뜨거운 열정으로 땀 흘려 일한 여름도 있었지

열심히 일한 것에 비해 소출은 적었어도

내가 심고 사랑으로 키운 게 의미 있는 아닐까

추수해서 다 팔고 나니 졸업한 기분이다

피곤해 잠깐 졸았는데 어느새 서리가 내렸구나

나이테 대신 주름살이 생기고

주근깨도 아닌 검은 반점은 무엇일까

여행 끝날 쓸 통행증 사진이 걱정되네

비록 쭈그렁덩이지만 웃으며 찍어 둬야지

이별의 날 지인들을 웃는 얼굴로 만나려면



이제 내리막 길만 남았는데

쉬울까 빠를까 아님 즐거울까

저 황혼처럼 아름답진 못해도

아프지 않아서 즐겁고 행복했으면

춥고 시린 겨울이 곧 온다고 하네

말년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 했는데

설상가상 눈까지 내린다면

저 길을 미끄러워 어찌 내려갈까



올라와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반기네

외로울까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라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메리카보다 라테가 입에 맞고

공경하느라 처졌던 어깨에 처음으로 힘을 주고

나이테가 훈장인양 장유유서 내세우니

하나 둘 눈치를 보는 것 같고

여기저기서 나만 빼고 쑥덕이는 것 같고

좋다고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리나

그래도 반박하는 게 얼마나 똑소리 나는지

급기야는 

뭐라고 중얼거리는 데 틀 자는 잘 못 들은 거겠지

 

 

 

왠지 화가 나

그냥 화가 나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나

나에게 화가 나고

이 세상에 화가 나

 

추워

점점 추워져

마음이 추우니 기가 막혀

허전한 손은 너무 시려

주머니 비어서 춥고 망설여져

어르신 우대증으로 겨우 견디는 데

쓸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라

제일 추운 건 무관심이고

가장 무서운 건 냉소의 눈길이더라



그래도 다행인 건,

가 막혀서 작은 소린 안 들리고

못 볼 걸 많이 봐서일까 눈도 어두워지고

 리고 겁나서 주먹 쥔 건 마음뿐이야

충성하던 치아이젠 떠나고 싶다 하니 뭔 말을 해

기억력도 쇠퇴해서 섭섭한 건 모두 잊는 중이야

 

 

저 아름다운 오색 단풍처럼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황혼처럼

멋지게 불태우고 싶었는데

품위 있게 폼 나게는 꿈이었나

 

 

나 보고 사추기라 하네

하긴 봄, 여름만 있는 게 아니니까

가을이 되면 누구나 겪는다는 데


그래 감당 안되던 사춘기도 넘겼잖아




*모두 아프다 하네요. 그리고 다 중요하다고 하네요. 어린이는 새싹이라 제일 중요하고, 젊은이는 나라의 기둥이라 중요하고, 여자는 연약해서 보호해줘야 하고, 직장인은 산업 전선에 있으니 중요하고.... 그렇지요.  그런데 용도 폐기된 노인네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게 현명한 것이라는 데.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 몇 자 적어봤습니다.  댁네 부모님께서는 사추기를 넘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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