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몸의 경계, 숨
한참 대학원 공부를 하던 무렵 명상을 접했다. 사실 불가에 있을 때 알긴 했지만, 이것이 학술적인 영역에서도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었는지는 미처 몰랐다. 당시엔 개신교회의 정체성에 매몰되어 있던터라 '기독교인이 명상을 해도 될까?'라는 생각에 갇혀 주저하기도 했었는데, 어느날 명상을 가르치던 선생으로부터 "명상은 종교가 있기 전부터 존재해왔다. 그저 불교의 전통에서 적용하기 쉬워 먼저 쓰였을 뿐"이라는 말을 듣고 복잡했던 머릿속이 툭, 하고 정리가 되었다.
한 때 열심을 내어 몸에 들였지만, 사는 게 바빠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러다 올 봄, 둘째가 태어난 후, 살림은 걱정말고 한 번 다녀오라는 옆지기의 권유와 배려로 다시 공부의 자리로 갔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고, 그것 좀 해봤다고 아무것도 없는 무의 자리에 나를 밀어넣는 게 왜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꾸벅꾸벅 계속 졸다가 떨어진 고개로 인해 잠에서 깨면 여러 생각에 끄달려 다니느라 지루할 틈이 없고, 이제 좀 익숙해질라 치면 끊어질듯한 허리 통증과 이제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 다리저림의 콤보로 인해 도대체 내가 공부를 하러온건지, 고통을 겪기 위해 온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목욕탕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지루함과 괴로움 사이를 오가다 문득 나의 호흡을 만났다. 모든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후 하고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새근거리는 얕고 가는 숨이 느껴졌다. 저렇게 얕고 가냘픈 숨들에 의지해 고단하고도 짙은 인생살이를 엮어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처럼 반가웠다.
요새는 첫째를 만나면서 유독 화가 많이 난다. 아니, 도대체 곰돌이 바지와 핑크치마가 뭐라고 이미 세탁기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있는 녀석을 눈에 보여줘도 그걸 입어야겠다고 떼를 쓰는 그에게 도토리집이고 도토리묵이고 관둬! 라는 말이 목젖까지 튀어나오려다가도, 크게 숨 한 번을 들이쉬고 나서 꿀꺽 삼킨다. 화가 완전히 삭혀지지는 않지만, 그저 숨의 자리로 한 번 마실 다녀오는 것으로도, 그에게까지 불꽃이 뿜어져 나오지는 않았으니, 이만하면 꽤 쓸만한 비밀공간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