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낳고 기르는 신비
아침 저녁마다 아이들의 웃음과 그보다 더 잦은 울음을 만난다. 웃음과 울음 사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거니? 라고 묻고 싶지만, 이들이 대답을 해줄리도 없고, 묻는 나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울음을 만나면 그들의 안색을 살피고, 웃음을 만나면 함께 웃으며 즐긴다. 그저 웃음의 자리를 이들이 좀 더 편안하게 여기를 바랄 뿐이다.
돌이 채 되지 않은 둘째는 아직 이빨이 나지 않았다. 장난삼아, 당신을 위해 틀니라도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하고 놀리기도 하는데, 그 말의 의미를 알 턱이 없는 그는 그저 자기 앞에서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속없이 웃는다. 이빨도 없는 잇몸을 가득 드러내며 에헤헤- 하고 웃는데, 그 웃음을 마주보며 그를 놀리던 나도 머쓱해져 덩달아 웃는다.
네 돌을 앞둔 첫째도 이제는 제법 둘째와 노는 법을 알아가고 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까꿍!하고 고개를 쏙 내밀기도 하고, 나름 위엄있는 목소리로 어흥! 하고 그를 위협하지만, 그는 그저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다. 첫째와 둘째의 웃음보가 한 번 터지면 댓 번이든 열 번이든 사골국물 우리듯이 웃음소리가 끊이지가 않는다. 다만 첫째가 너무 흥분을 해서 둘째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 때가 되면, 냉큼 달려가 '선생님! 이제 그만하시지요!'라고 자제를 해드려야 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가 동생과 함께 즐기는 이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사실, 이런 시간들은 모두 옆지기의 공이 크다. 이따금씩 그를 쳐다보면 그의 시선은 책을 읽거나, 종이접기를 하던가, 입고 싶은 옷을 고르는 첫째에게 떼지 않으면서, 두 손은 자기 팔, 또는 종아리를 잡고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둘째가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고 있는 걸 본다. 어린 생명들 사이에 엉켜서 엉거주춤 하고 있는 그에게 '사랑받고 있네~'하며 짐짓 놀려주면 그는 마지못해 웃기도 하고, 지쳐있을 땐 입으로 놀릴 시간에 언능 하나라도 데려가지 않고 뭐하냐고 성을 내기도 한다.
이른 아침에 방에서 공부를 하다 잠시 어깨를 피러 거실에 나오니 창문 사이로 내려앉은 아침 미명 사이로 옆지기와 아이들이 엉킨 실타래처럼 서로 똘똘 뭉쳐 있는 게 보였다. 엄마 젖을 입에 문 채로 잠든 둘째, 언제 그리 힘을 썼는지 의자 밑에 머리를 집어넣고 발로 엄마의 머리를 차고 있는 첫째, 첫째의 발공격에 고개가 꺾였음에도 굴하지 않고 입 벌리고 자고 있는 옆지기의 모습을 가까이 다가가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에게도 꿈이 있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나. 매일 아침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회사에 가서 일을 했던 그가 어느새 자신의 몸으로 두 생명을 낳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어미가 되어 있었다. 그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그를 위해서라도 애를 써야한다는 절박함 등 스스로도 다 헤아리기 어려운 복잡한 심정 사이를 거닐다, 간신히 일어섰다.
인생은 혼자 걷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느덧 함께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아졌다. 새로운 진로를 여는 것도, 밥벌이도, 육아도, 살림도,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기에 일상이 고단하지만, 그 고단함도 잊을만큼 이들과 함께하는 기쁨이 크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여전히 이런 기쁨을 누릴만한 자격이 내게 있는 것인지 묻긴 하지만, 그 대답을 대체 누구에게 들을 수 있겠는가. 그저 이 모든 것들도 봄날의 꽃처럼 한 때임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