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진 새벽, 혹여 다른 이가 깰까 나즈막하게 울리는 알람을 서둘러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방을 찾아간다. 스위치를 켜자마자 쏟아지는 하얀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살이 찌푸려진다. 컴퓨터를 켜고, 익숙하게 영상을 찾는다. 나의 이름조차 알릴 없는 영상 속 선생은 부지런히 판서를 써가며 공식들을 유도하고, 외워야 할 우선 순위를 알려준다. 아니 왜 오디오를 깔끔하게 수음을 못해가지고 귀를 불편하게 만드는지, 모션그래픽이 너무 후지네.. 내가 만들어도 저것보단 더 잘만들겠다 하며 품평을 하기도 한다.
강의 하나 끝날 때마다 외워야할 수식들의 양에 한숨이 나오면서도, 20여년 전 학교 강의실에서 들었던 내용들이 흐릿하게나마 겹쳐지는 걸 느끼며 그래도 아주 승산이 없지는 않겠다 안도하기도 한다. 난 도대체 왜 이렇게 먼 길을 돌아서 가는걸까. 남들이 다 할 때 그걸 하지 않은 죗값을 치루는거지 하며, 스스로에게 위안을 삼다 문득 지난날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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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여름, 난 막 첫번째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내 마음속에는 푸른 꿈이 있었다. 논문 학기를 보내면서 이미 영어학원을 등록해놓았다. 가고 싶은 대학원도 몇 개 찜해두었다. 무엇보다 가난했던 살림에 공부를 하는 동안 가장 절실했던 경제적인 도움을 구할 곳도 찾았다. 이제는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마음속에서 여전히 외치고 있는 불안들이 있었지만, 어차피 이 길이 나쁜 길도 아니잖아, 1년 안에 나는 템즈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피쉬앤칩스를 먹으며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을꺼야. 걱정마. 하며 잠시 밀쳐두었다.
마지막 스폰을 약속받던 날 밤. 공용식당에서 밥을 먹던 나는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게 뜬금없이 자기가 일구고 있는 공동체 이야기를 했다. 아니 도대체, 그 이야기를 왜 내 앞에서 하는거에요? 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아버지 뻘이었기에 조용하게 듣고 있었다. 내 속에서 벌어지는 소란에 대해 알리 없는 그는 내가 잘 듣고 있다고 착각(?)했는지, 본격적으로 공동체 사업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아니, 그래서 저기 깊은 골짜기로 날 데려가서 닭 키우고 농사짓고 살겠다고요? 미치겠네...
그는 나와 헤어지면서 성서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박혀서 떠나질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교수라는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 그의 200만원짜리 중고 카니발에 실려 깊은 산골짜기로 터전을 옮겼다. 그곳에서 나는 털털거리는 1톤 트럭을 몰고 다녔다. 공동체가 살 집을 짓기 위해 밤에는 도서관에서 건축 공부를 하고 낮에는 목수들과 함께 못총을 쥐었다. 틈틈히 양계를 하는 형제와 함께 닭모이를 주고, 산란장에서 달걀을 주워왔다. 어미닭의 품에서 갓 나온 달걀이 이토록 맛있더라는 걸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지 알거 같았다. 세상 모두가 이 맛을 알면 달걀이 금방 동이 날 테니까 ㅎ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지금의 옆지기를 만났다. 스스로는 이 나이에도 쌓아놓은 재산도 없고, 번듯한 직장도 없는 내 지난 날들이 부끄러웠는데, 그는 내가 남들이 다 하는 그런길을 가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온 삶의 여정이 듣기 좋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라면 어디를 가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도 했다. 그의 말이 참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모태신앙으로 평범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던 옆지기는 혼인과 함께 기꺼이 한몸살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그 날을 떠올리면 여러 생각이 든다. 그 때 내가 그의 이야기에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가던 길을 갔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처럼 밥벌이에 대한 고민은 더 적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함께 지내고 있는 한몸살이 이웃들과 옆지기, 그리고 두 아이들을 영영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해지 않았을까? 하고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