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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간호사 KokoA Feb 03. 2024

우울할 용기

용감하기에 아름답다

요즘 기분 어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다정한 사람.

본인은 다정하지 않다고 하지만 본인이 얼마나 다정한지 모르는 사람이 다정하게 물어왔다.


“좋아요!”


얼마 만에 내 기분을 알았을까? 이렇게 명확히 분명하게 ‘좋다’고 얘기한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놀랬다.

가족이든 친구든 주치의든 누군가가 내 기분에 대해 물어오면 나는 거의 항상 ‘모르겠다’고 답했다.

정말 몰랐으니까.


우울은 나를 모나게 무뎌지게 했다.

우울증에서 에너지 저하, 권태, 피로가 흔하다. 아주 작은 일에도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아침에 씻고 옷을 입는 것과 같은 간단한 일에도 지친다. 서서히 일상은 파괴되어 간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추락하느라 늘 신경은 곤두서있고 불안하고 예민하고 피곤하다. 스스로를 챙길 수도 없을 만큼 진이 빠진다. 나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모나게 무뎌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신경질적이고 날카롭고 과민하고 짜증스럽지만 냉소적이고 무관심해진다. 마침내 사려(思慮) 하지 않게 된다. 완전히 나를 붕괴시키지 않으려면 내 기분 같은 건 몰라도 되게 된다.

그렇다. 내가 여태 내 기분을 몰랐던 것은 몰라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지도 모르는 내 기분 따위는 상관없었다. 나는 우울했지만 우울해서는 안 됐다. 그 사이의 간극은 점점 넓어져 갔다. 그 간극에서 괴로움을 느꼈다고 얘기하는 내게 다정한 사람이 물었다.


"왜 우울하면 안 돼?"


그녀의 다정한 화살은 내 마음을 관통했고 뚫린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했다. 나는 왜 우울하면 안 됐을까?


우울하다는 것은 ‘정상’이라고 지칭되어 ‘보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프레임(틀)’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 ‘프레임(틀)’에 맞지 않는다는 건 ‘비정상’이며 ‘보통’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나는 그 ‘정상과 보통’의 정의가 두려웠다. 정상과 보통, 다수로 움직이는 이 사회에서 비정상과 이상, 소수로 움직인다는 것은 내가 고른 이 선택지가 정답이 아니라 오답인 것 같은 느낌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해답지도 없어 정답인지 오답인지 확인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나는 이미 30살에 국제결혼을 한 경험이 있는 ‘이혼녀’라는 낙인이 있고 거기에 ‘우울증’이라는 주홍글씨까지 새겨지는 것은 ‘정상과 보통’의 범주에서 한참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의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었다. 언제 그 살얼음판이 깨져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의 정체성을 다 들킨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운 공포였다. 나는 세상이 정해놓은 ‘프레임(틀)’에 어떻게든 들어가야 했다.


그러기에는 '프레임(틀)'은 너무나도 많았다. 프레임(틀)의 예들이다.

무기력에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운 이에게 미라클 모닝이니 갓생이니 하는 노력의 프레임

식욕의 감소와 증가에 따른 체중 변화가 나타난 이에게 자기 관리 부족의 프레임

수면교란으로 인한 과수면 혹은 불면증을 겪고 있는 이에게 게으름의 프레임

집중곤란과 기억력손상을 겪고 있는 이에게 무능의 프레임

원인 모를 통증을 겪고 있는 이에게 엄살의 프레임

‘사랑받고 자란 티 난다’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 부모까지 문제로 만드는 죄책감의 프레임


그래서 나는 무던히도 그 프레임(틀) 안에서 어떻게든 내 우울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애썼다.

매일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했다. 몸을 상하게 하는 무리한 다이어트로 체중을 엄격하게 관리하며 자기 관리에 철저한 척, 내 몸의 모든 세포를 동원해 집중하고 기억해 어떻게든 내게 주어진 업무를 해냈다. 졸음이 미친 듯이 몰려오면 독한 카페인을 때려 넣었고 잠들 수 없는 밤에는 수면제를 먹으며 수면 패턴을 억지로 지키며 부지런한 척했다. 이따금 심한 우울에 찾아오는 찢어질 것 같은 이유 없는 등 통증은 모른 척했다.

나는 그렇게 계속 연극을 해왔다. 그러나 끝나지 않는 연극은 없다. 연극은 끝나기 때문에 예술이다.

나는 연극을 끝내고 인생을 예술로 살고 싶어졌다.


<절규>라는 걸작을 남긴 노르웨이 출신의 뭉크는 어떤 정신 질환을 앓았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양극성장애(조울증)를 겪었을 것이라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내가 인생을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병처럼 내게 필요한 것이다.
불안과 질병이 없다면 나는 조타기가 없는 배와 같을 것이다.
나의 고통은 나 자신과 나의 예술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나와 구분할 수 없는 것이며 질병을 없애면 나의 예술도 없어진다.
나는 나의 고통을 계속 가지고 있고 싶다”  
-Edvard Munch 에드바르트 뭉크-

나는 아직도 내 이 두 가지 정체성 "이혼녀"와 "우울증"을 누군가가 알게 되는 것이 두렵다.

그 '프레임(틀)'으로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난도질을 당하게 될까 봐 겁이 난다. 그 살얼음판이 깨져 깊은 물속으로 빠지면 허우적거리다 죽음에 가까운 공포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뭉크가 이야기한 것처럼 나의 우울은 나 자신이고 나의 예술의 일부분이다.


아름다운 것은 용감하다.

용감하기에 예술은 아름답다

이제 아름답기 위해 용기를 내고 싶다.

'우울할 용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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