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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간호사 KokoA Jan 27. 2024

단정한 우울

저온 화상의 진단과 치료

환상을 찾아 헤맸다. 

환상은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품에서 드는 잠’이었다. 


사랑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연애를 해야만 했다. 연애를 하면 사랑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연애들은 뜨겁지 못했다. 그 연애들은 몸과 마음이 회피 반응을 일으킬 만한 온도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 연애들이 온도를 올릴 수 없었던 것은 그 연애들 속 어디에도 ‘사랑’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울에 집어삼켜진 나는 외로웠고 먹지 못 했고 자지 못 했다. 나는 외로운 게 싫었고 먹고 싶었고 자고 싶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나에게 연애는 단지 나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 연애가 잘 될 리가 없었다그런 수단으로써의 지속된 만남은 서서히 낮은 열을 마음에 축적했다. 

그 낮은 열은 가스라이팅이기도 했고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삐뚤어진 소유욕이기도 했으며 나의 우울에 대한 무관심이기도 했다.  


우울은 내 감정에 벽을 쳤다. 우울이 깊어질수록 그 벽은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도록 더 더 높게 높게 쳐졌다. 그래서 나를 서서히 태워내는 그 낮은 열을 느낄 수가 없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적어도 ‘혼자’는 아니라는 불편한 안도감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온 화상과 달리 저온 화상은 뜨겁다고 느끼는 온도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화상이 진행되어도 눈치채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색이 오고 통증이 생기고 서서히 물집이 잡히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 연애들의 마지막에 있었던 사람과의 끝이 오고 나서야 나는 오랜 시간 그 해로운 낮은 열들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집이 터져 진물 나는 마음에 ‘진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날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나도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환상’ 같은 건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은 ‘환상’은 없었지만 병식’은 있었다.(*병식: 환자가 자신이 병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 

더 이상 열이 내 심부(深部)로 침투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아직 가벼운 화상정도일 때 치료해야 했다. 

나는 치료 계획을 세웠다.


<치료 계획>
열의 원인 파악 → 열의 원인 제거 → 찬물로 식히기 → 축적된 열기 배출하기 → 병원 방문 후 치료

1. 열의 원인 파악

우울, 외로움 불면, 식욕 부진, 체력 부족 등


2. 열의 원인 제거 

우울: 나의 우울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돌보는 주치의와 상의하고 치료하기

외로움: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기

불면: 수면제

식욕 부진: 우울이 호전되면 함께 호전될 것이므로 우울 치료와 병행

체력 부족: 꾸준한 운동과 충분한 수면


3. 찬물로 식히기: 공식 외우기

괜찮지 않다, 우울하다 = 아프다


4. 축적된 열기 배출하기

사랑하는 것(책 읽기, 요리, 요가, 글쓰기 등)에 마음을 다시 기울여  쌓여있던 낮은 열들 내보내기


5. 병원 방문 후 치료

약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한 나의 용기를 칭찬하고 힘껏 나의 주치의를 믿고 적극적으로 치료에 참여하기 



존재하지도 않았던 ‘환상’은 깨졌다. 

아니, 나 스스로 그 ‘환상’을 깼다. 


그 ‘환상’은 작게, 크게 많은 파편들을 남겼다. 요즘 나는 그 남겨진 ‘환상’의 파편들을 치운다. 가끔 큰 파편에 찔려 울 때도 있다. 그럴 땐 실컷 울게 한다. 눈물은 마음을 정화(浄化)시켜 파편들을 씻어 내린다. 자잘한 파편들이 씻겨 내려가면 큰 파편을 빼기 한결 수월해진다. 펑펑 울고 울음을 그치고 나면 큰 파편을 뺀다. 뺀 자리에 피가 나면 지혈을 하고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면 된다. 일단은 응급 처치, 그래도 안되면 SOS.

단, SOS는 내가 '진심'으로 대하고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만 요청할 것.


나를 재우지 못했던 ‘환상’은 사라졌고 내가 나를 재운다. 

매일 밤 세심하고 상냥하게 나를 의식(意識) 하기 위한 작은 의식(儀式)이 이루어진다. 

따뜻한 물로 목욕재계 후 의식 도구를 준비한다. 정갈하게 정리된 침대에서 의식(儀式)을 시작한다. 

*의식 도구: 샌달우드 향 캔들, 쇼팽이나 드뷔시,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 책 1권, 허브티 1잔, 나무괄사


의식(儀式)은 간단하다. 침대에 앉아 오감을 사용하는 것뿐이다. 향을 맡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허브티를 한 잔 마시며 가볍게 나무괄사로 림프 마사지를 해주고 스트레칭을 한다. 의식(儀式)이 끝나면 꿈천사가 찾아온다. 


이렇게 나의 다정하고 단정한 우울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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