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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간호사 KokoA Jan 13. 2024

바다 너머의 우울

어질러진, 흐트러진

정신과 간호사가 되어서 우울에 대해 공부하고 우울을 겪는 환자들을 직접 보니 우울의 얼굴이 너무나도 다양해서 놀랬고 그 놀람은 현재진행형이다. ‘이것도 우울이었어?’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우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우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먹지 않거나 못 자거나 하는 이런 능동적이고 선택한 액션이라면 내가 보고 겪은 우울은 슬퍼하거나 울지는 않으나 무기력하고 너무 먹거나 너무 자거나 하는 수동적이고 위축된 액션이었다. 


정신과적으로는 병식(자신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인지하고 수용하며 이해하고 치료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치료의 방향과 결과를 크게 좌우한다. 그래서 병식이 있는 환자들은 예후가 좋다. 일본에서 나는 병식이 없는 우울증 환자였다. 그래서 나는 치료 시기를 한참 놓친 후에야 병원에 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울증의 이미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우울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흔히 말하는 천의 얼굴이 우울증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라. 

얼마나 다양한지 정신과에서 진단을 내릴 때 자주 쓰이는 DSM5의 우울증(주요우울장애)의 진단 기준을 가지고 와 봤다. 이것만 봐도 증상이 무려 9가지나 된다. 


<DSM-5 TR 진단 기준>

A. 다음의 증상 가운데 5가지(또는 그 시아)의 증상이 같은 2주 동안 지속되며 이전 기능과 비교하여 변화를 보인다. 증상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1) 우울 기분이거나 (2) 흥미나 즐거움의 상실이어야 한다.

1. 하루 중 대부분, 거의 매일 지속되는 우울한 기분이 주관적인 보고(예. 슬픈, 공허한 또는 절망적인)나 타인에 의한 관찰(예. 눈물 흘리는 모습)에서 드러남(주의점: 아동・청소년의 경우는 과민한 기분으로 나타나기도 함)
2. 거의 매일, 하루 중 대부분, 거의 또는 모든 일상 활동에 대해 흥미나 즐거움이 또렷하게 저하됨
3. 체중 조절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의미 있는 체중의 감소(예. 1개월에 5% 이상의 체중 변화)나 체중의 증가, 거의 매일 나타나는 식욕의 감소나 증가(주의점: 아동에서는 체중 증가가 기대치에 미달되는 경우)
4. 거의 매일 나타나는 불면이나 과다수면
5. 거의 매일 나타나는 정신운동 초조나 지연(타인에 의해 관찰 가능한, 단지 안절부절 또는 처지는 주관적인 느낌만이 아닌)
6. 거의 매일 나타나는 피로나 활력 상실
7. 거의 매일 무가치감 또는 과도하거나 부적절한 죄책감(망상적일 수도 있는; 단순히 아픈 데 대한 자책이나 죄책감이 아닌)
8, 거의 매일 나타나는 사고력이나 집중력의 감소 또는 우유부단함(주관적 설명에 의하거나 타인에 의해 관찰 가능한)
9. 죽음에 대한 반복적인 생각(단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구체적인 계획 없이 반복되는 자살 사고, 구체적인 자살 계획, 또는 자살 시도 


돌이켜보니 나의 우울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건 일본에서였던 것 같다. 2013년 여름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취득하고 그해 겨울, 후쿠오카로 건너갔다. 하필이면 12월 중순(날짜도 정확히 기억한다. 12월 17일)이었고 혼자 이주해서 적응해야 하는 시기에 연말연시까지 겹쳤다. 크리스마스, 12월 31일, 설날 등 가족, 친구, 연인들과 보내는 이벤트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었고 역시나 외로움은 나를 덮쳤다. 거기다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온돌이 없는 데다가 단열까지 잘 안 돼서 집이 얼음장같이 차갑다. 집 안에서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다. 싸늘하고 추운 집 안에서 홀로 처음 만나는 고독감에 압도되었다. 


여기 너 말고 아무도 없어

나를 에워싼 공기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듯했다. 

처음 겪는 ‘공(恐, 空)’들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야 했다. 당장 다음 달 월세, 공과금,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 다행히 일본에 오기 전부터 일본어는 유창했고 일은 생각보다 쉽게 구해졌다. 낮에는 편의점에서 밤에는 선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간은 일로 꽉 들어찼지만 마음은 늘 허했다. 돈을 벌면 물건이든 음식이든 무엇으로라든지 채워야 했다. 작은 원룸에는 물건들이 가득 들어찼다. 바닥에 짐이 널브러져 있어 발 디딜 곳도 없었다. 입었던 옷들도 그대로 헹거에 던져두고 빨래도 미루었다. 옷 무게에 눌려 헹거는 힘없이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모양이 변형되기도 했다. 우울증이 중증으로 진행되면서는 불면으로 바뀌고 못 먹게 되었지만 우울증 초반에는 잘 수만 있으면 잤고 쉬는 날에는 음식을 잔뜩 먹고 열 시간 넘게 잤다.


발 디딜 곳도 없는 방은 틈 없이 가득 채운 내 상처가, 옷 무게에 눌려 힘 없이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 변형된 헹거는 우울에 치우쳐 찌그러진 내 마음이, 음식으로 채우려 했던 것은 내 공허함이, 자도 자도 모자랐던 잠은 내 모자란 자존감이 고개를 든 것이었다. 


우울증 환자들 중에는 정리 정돈을 못하고 감정 기복이 심하고 충동적이어서 과소비를 하거나 무기력하고 의욕이 안 생겨 하루 열 시간 넘게 과수면을 취하거나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랬다. 

나의 무질서와 무자제, 과수면과 낮은 자존감을 그저 내가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고 약하고 가진 게 없어서라 생각했다. 

'아프다'는 인식이 없으니 고칠 수가 없었다. 그저 내 '잘못'이라 생각하고 후회하고 자책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나의 바다 너머의 우울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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