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신과 간호사 KokoA Jan 06. 2024

새로운 진단명을 찾아서

우울증만으로 이렇게 히스토리가 어지러울 순 없다.

*히스토리: 환자가 어떠한 질환에 이르게 된 계기


간단하게 내 히스토리를 요약하자면

- 8년간의 일본살이
- 6년간의 국제 연애
- 3년간의 국제결혼
- 향수병과 불면 도래
- 이윽고 우울감
- 그리고 이혼과 귀국


사랑했다.

사랑을 하면 감정들의 실핏줄이 다 보일 정도로 얇고 투명해졌고 숨기지 않았다. 설령 찢어지더라도.

하지만 사랑만으로 가리기에는 향수병은 너무도 짙었다. 우울은 채도를 올렸다. 진해진 우울의 색에 사랑은 옅어졌다. 진한 우울의 진동은 커져가 지진이 났다. 지진은 쓰나미를 일으켰고 그 쓰나미는 불면, 폭식, 심한 감정 기복의 얼굴을 하고 차례차례 덮쳐왔다.

나는 무너졌고 도망쳤다.


한국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지진은 어디서나 일어난다. 한국으로 돌아와도 작은 진동은 이어졌고 그 진도는 나를 흔들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여전히 잠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엔 먹을 수가 없었다. 감정에 기(起)는 없고 복(伏)만 있었다. 나는 일어나지 못했고 바닥 끝까지 내려갔다.


일단은 자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병원에 갔다.


“그냥 잠만 자게 해 주세요. “


정신과 간호사가 돼서 생각해 보니 내가 정신과를 너무 얕본 것 같다. 정신과에는 ‘그냥’이 없다. 원인 없는 증상은 없다. 의사는 내 불면의 원인을 알아내려 했고 그렇게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어 머금고만 있던 히스토리를 읊었다. 찬찬히 듣고 있던 의사는 내게 뇌파 검사와 간단한 우울증 검사를 권했고 그렇게 이혼녀라는 꼬리표에 우울증이라는 꼬리표가 더해졌다. ‘우울증 이혼녀’


약물 치료를 시작하고 종종 수면제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잘 수 있었고 바닥 끝에서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쓰나미가 덮치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우울증 약을 먹으니 우울감은 나아졌지만 사랑과 8년이라는 시간을 잃어버린 상실감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마음은 늘 허기졌다.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공허함으로 10kg이 늘었다. 그래서 괜찮아진 척 의사의 질문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약을 줄여보고 싶다 했고 이후에는 약을 끊었다. 약을 끊은 후 10kg을 뺐다.

10kg이 빠지는 동안 집중력도 기억력도 함께 빠져나가 다시 찾아온 사랑에도 전력(全力)을 다하지 못했고 나의 일을 아끼면서도 몰두하지 못해 실수가 잦았다.


몸이 아플 때도 그럴 때가 있지 않던가? 분명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문제를 알게 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어서 피할 때 말이다. 정신과에서 근무하며 여러 환자들을 지켜보았고 돌봤다. 환자들을 통해 내게 우울증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울증만으로 이렇게 히스토리가 복잡하고 어지러울 순 없다. 우울증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어 발버둥을 쳤는데 꼬리표를 하나 더 달게 생겼다. 그래도 나는 내 문제를 찾아야 했다.


의사에게 집중이 안 되고 기억이 안 나고 머릿속은 뿌옇다, 자주 깜빡하고 덜렁거린다고 일단 생각나는 증상들을 이야기기하니 덤덤하게 의사는 우울증 증상이라고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의사의 말에 수긍했을 테지만 이번엔 물러날 수가 없었다. 내 히스토리가 이토록 점점 꼬여가는 게 절대 우울증뿐만이 아니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야 했다. 부끄러워 숨기고 있던 히스토리로 내가 단순 우울증이라는 의사의 방패에 창을 들었다. 나의 소득을 넘어선 낭비벽,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버릇들, 나도 모르게 부딪히고 긁혀 나 있는 상처들, 가만히 앉아 있는 게 고역 같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영화 감상 등.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의사는’ 검사’ 하자고 말했다. ‘검사’는 40분 정도 진행되었고 결과도 바로 그날 들을 수 있었다. 의사가 말했다

성인 ADHD 같아 보여요.

그렇게 서른셋, 12월의 마지막 날
새로운 진단명이 왔다.
기존 진단명: 우울증
추가 진단명:  성인 ADHD
*이해를 돕기 위해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명칭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이전 01화 죽어도 되지만 죽기는 싫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