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애는 잊어요
큰맘 먹고 몇십 만원 하는 명품 파우치를 샀었다.
연말에 스파에 갔다가 명품 파우치를 스파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집에서 발견했던 일이 있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① 스파 노천탕 입욕(수영복 착용)
② 입욕 후 수영복 정리(수영복 탈수 후 비닐봉지에 넣음)
③ 왜 노천탕에 파우치를 들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파우치도 함께 비닐봉지에 넣음
④ 집에 돌아옴, 돌아와서 비닐봉지째로 세탁실로 가지고 감
⑤ 아침에 출근 준비하면서 화장하려 파우치를 찾는데 파우치가 없어진 걸 알게 됨
⑥ ③을 깜빡 잊고 몇 십만 원짜리 파우치가 없어졌다고 아침부터 난리를 침
⑦ 하필이면 그날 더블(아침 8시에 출근 10시 퇴근) 근무여서 더 정신없었음
⑧ 스파에 전화를 했는데 없다고 하는데 포기가 안되고 일이 안 잡힘
⑨ 집에 돌아와서 밀린 빨래 하려고 세탁 바구니 정리하다가 비닐봉지 발견
⑩ 비닐봉지 안에서 파우치 발견함, '뭔가 잘못되었음'을 인지
우울증 증상 중에 기억력, 인지력, 집중력 저하가 있는 건 안다. 그렇다고 해서 건망증이 이렇게까지 심해진다고?
우울증만으로 이럴 수는 없어요.
나는 간호사다. 그래서 병원에서 오히려 더 말을 아꼈다. 다른 나라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는 환자와 의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나 갑을 관계가 존재하는 것 같다. 특히나 정신과는 더 그런 경향이 있는 듯하다.
나는 언제나 착한 애였다. 환자면서도 착했다. 교대 근무를 하면서도 꼬박꼬박 예약 날짜를 지켜 면담을 다니며 치료를 받았고 약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아, 약은 모르는 게 약이라고 생각해서 먹기도 했지만) 하지만 우울증만으로 이렇게 정신이 없을 수가 없다.
나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회피형이라 착한 애가 편했기에 여태껏 내 진단명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건 당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그럼에도 불편을 감수하고 거슬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저 우울증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우울증 말고 다른 게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기억이 안 나고 생각이 안 나고 집중을 못 하는 건….”
“성인 ADHD를 의심하는 거예요? 현진 님은 심한 우울일 뿐이에요.”
아뇨
단호한 내 말투에 주치의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공기가 불편했다. 그래도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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