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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간호사 KokoA May 04. 2024

안녕! ADHD

머리카락과 동전

너만 오면 온 집에 머리카락이야.

20대 중반에 잠시 단발을 했던 것 말곤 34살이 된 지금까지 늘 긴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에게 머리카락 떨어진다는 잔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머리가 길어서 눈에 잘 띄는 것도 있겠지만 사실 나는 자주 머리를 쓸어 넘기거나 묶었다 풀었고 끊어지거나 갈라지는 머리끝을 뜯기도 했다. 그건 불안하다거나 초조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손을 가만두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 나에겐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분명히 있었다. ADHD의 다른 얼굴. 과잉행동-충동성


ADHD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ADHD의 과잉행동-충동성 면이다. 


정신 질환의 진단 기준으로 자주 쓰이는 DSM-5에서는 ADHD의 과잉행동-충동성 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과잉행동-충동성
 a. 종종 손발을 만지작거리며 가만두지 못하거나 의자에 앉아서도 몸을 꿈틀거림
 b. 종종 앉아 있도록 요구되는 교실이나 다른 상황에서 자리를 떠남.
 c. 종종 부적절하게 뛰어다니거나 기어오름
 d. 종종 조용히 놀거나 여가 활동에 참여하지 못함
 e. 종종 ‘끊임없이 활동하거나’ 마치 ‘태엽 풀린 자동차처럼’ 행동함
 f. 종종 지나치게 수다스럽게 말함
 g. 종종 질문이 끝나기 전에 성급하게 대답함
 h. 종종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함
 i 종종 다른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거나 침해함


덤벙거리고 칠칠치 못한 성격으로 나타나는 부주의한 면에 가려져 있던 다른 얼굴을 위에 나열한 증상들 중에서 찾아보자면 a, e, h였다. 그러나 벽돌 같은 두께의 책에 친절하지 못한 의학용어와 전문용어의 연속으로 쓰인 진단 기준으로는 과잉행동-충동성이 어떤 면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간호사고 눈높이에 맞게 쉽게 설명하는 게 일인 사람이다. 이 직업병은 글에서도 숨기지 못해 이번엔 나의 과잉행동-충동성 일대기를 가지고 왔다.


a. 종종 손발을 만지작거리며 가만두지 못하거나 의자에 앉아서도 몸을 꿈틀거림.

엄마가 견딜 수 없어하던 나의 머리카락들은 나의 이 부산스러움의 산물이다.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할 게 없을 때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거나 손빗을 빗거나 갈라진 머리끝은 갈라보거나 뜯어냈다. 


e. 종종 ‘끊임없이 활동하거나’ 마치 ‘태엽 풀린 자동차처럼’ 행동함

끊임없이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때론 '태엽 풀린 자동차'일 때가 있었다. 내가 '태엽 풀린 자동차'가 될 때는 나는 뭔가 하나에 꽂힐 때였다. 꽂힌 것을 시작하면 과하게 집중하게 되고 멈출 줄을 몰랐다. 예를 들면 청소다. 엄마가 진절머리 친 바람에 나도 내 머리카락은 늘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 평소에 조금씩 치우고 청소기도 돌린다. 그렇게 지내다 머리카락이든 먼지든 얼룩이든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면 그날 하루는 거기에만 꽂힌다. 그럼 그날 하루는 청소만 해야 한다. 허기가 지면 먹고 지치면 쉬면서 해야 하는데 멈출 줄을 몰랐다. 청소를 하고 몸살이 날 정도였으니까. 그땐 '평소에 대충 치우니까 이렇게 꼼꼼하게 치우는 날도 있어야지, 몰아서 하면 편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태엽을 풀고 멈추지도 못하고 해댔던 건 어렵게 도달한 '몰입'이 깨질까 봐 두려워서였던 것 같다. 그렇게 모순적이게도 집중하지 못했던 나는 병적으로 몰두하기도 했다. 


 h. 종종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함

기다리는 건 지금도 너무 싫다. 아무리 음식이 맛있다 해도 웨이팅은 싫었다. 줄이 너무 길다 싶으면 일부러 찾아서 간 곳도 포기할 때도 있었고 차라리 사람이 덜 붐비는 평일에 갔다. 


그러나 ADHD가 어려운 건 알기 이렇게 눈에 보이는 쉬운 과잉행동보다 눈치채기 어려운 충동성이 저변에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나는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계속 꼼지락거리고 수다스러운 아이도 아니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과도하게 안절부절못해서 다른 사람을 지치게 하지도 않았으니 저 행동들이 과잉행동이라 나 스스로도 내 주변 사람들도 나의 행동을 과하다 생각하지도 않았고 내 주치의마저도 저 정도의 가벼운 과잉 행동으로는 ADHD로 진단해주지 않으려 했다. ADHD 검사 결과를 보고도 내 주치의는' ADHD예요'가 아니라 'ADHD 같아 보여요'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나는 나도 모르게 ADHD를 앓고 있었다. 내가 앓고 있었던 건 충동성이었다. 충동성은 심사숙고 없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성급한 행동과 연관이 있는데 나는 즉각적인 보상을 좋아했고 만족이 지연되는 것을 참지 못했다. 특히 직장에서 더 그랬다. 나는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하지 못했다. 일을 배우는 과정에서 실력이 금방 늘지 않는 것을 못 참아했고 늦은 보상과 더딘 만족을 버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제껏 지나온 나의 직장 혹한기들은 적절한 정보 없이 장기적인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덜컥 취직해 버린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늘 직업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직업적 불안정성은 직업적 수행, 소극적 참여, 낮은 성취도를 뜻한다. 나는 늘 일을 못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못한다'는 생각이 지배하자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나쁜 면이 있으면 좋은 면도 있다.


동전을 뒤집었다.


내 주변 사람들이 평가하는 나는 "실행력"과 "추진력"이 있는 사람. 어쩌면 나의 이 강점들은 ADHD가 준 주의와 충동성의 선물일 수도 있다. 

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다-하고 싶다-해야지의 스텝이 빠르다. 쉽게 말하면 좋아하는 것에 있어서는 꾸물거리지 않는다. '해야지'라고 하는 순간부터 조금은 성질이 급하다 싶을 정도로 빨리 움직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있어서는 잘하고 잘하게 되고 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냈고 요가를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동전을 뒤집었으니 이제 물린 꼬리를 떼어내야했다. 머리카락이야 덜 빠지는 탈모 샴푸로 바꾸고 덜 끊기는 좋은 빗을 사고 그래도 빠지면 치우면 되고 엄마의 청소거리를 좀 더 늘려서 잔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엄마를 해치는 건 아니다. 종종 대청소 몸살은 하겠지만 건강을 해칠 정도는 아닐 테고 웨이팅 하는 맛집이 아니더라도 맛집은 많다. 한참을 돌고 돌아서 겨우 잡고 나니 숨이 차서 삐딱해졌다. 

내가 뭐 어때서? 그리고 나는 따지기 시작했다. 


들어봐.
프라다파우치는 오늘도 공장에서 나와.
아 장인이 만드려나? 명품이니까.
열쇠도 없고 오토락도 고장 났어?
그럼 문 뜯어서 들어가.
감기가 심하게 들었어?
그럼  약 먹고 쉬는 거야.

이렇게 한참을 따지고 ADHD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이 아니라 안녕!으로 


안녕! ADHD

그리고 나를 좀 먹으려 했던 두려움에게 

겨우 이 정도로 날 집어삼키려 했다고?

난 이제 네가 시시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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