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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간호사 KokoA Apr 27. 2024

안녕? ADHD

정신을 두고 온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온다.


알고 무서운 게 모르고 무서운 것보다는 덜 무서울 것이라 이상한 믿음. 그래서 나는 무서울 때면 공부를 했다. 나의 문제들이 우울뿐만이 아님을 인지했고 공부하다 보니 결론은 ADHD였다. 내겐 널리 흔히 알려져 있는 과잉행동은 없었지만 내가 어쩌면 내가 ADHD일지도 모르겠다 의심했던 증상은 “부주의”였다. 


정신 질환의 진단 기준으로 자주 쓰이는 DSM-5에서는 ADHD를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정의하고 있다.


부주의점
 a. 종종 세부적인 면에 대해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거나, 학업, 직업 또는 다른 활동에서 부주의한 실수를 저지름
 b. 종종 과제를 하거나 놀이를 할 때 지속적으로 주의 집중을 할 수 없음
 c. 종종 다른 사람이 직접 말을 할 때 경청하지 않는 것처럼 보임
 d. 종종 지시를 완수하지 못하고 학업, 잡일 또는 작업장에서 임수를 수행하지 못함
 e. 종종 과제와 활동을 체계화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
 f. 종종 지속적인 정신적 노력을 요구하는 과제에 참여하기를 기피하고 싫어하거나, 저항함
 g. 과제나 활동에 꼭 필요한 물건들을 자주 잃어버림
 h. 종종 외부자극에 의해 쉽게 산만해짐
 i. 종종 일상적인 활동을 잊어버림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거야?

종종 어쩌면 자주 듣던 말이다. 위에서 나열한 증상들 중 나의 주증상을 고르자면 a, c, f, g였다. 

사실 저 책은 너무 전문적인 용어로 쓰여 있다. 나는 정신과 간호사이고 설명되어 있어도 “그래서 어떻게 부주의하다는 건데?” 하며 몇 번 갸우뚱했다. 이해하기 위해 나의 부주의의 일대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a. 종종 세부적인 면에 대해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거나, 학업, 직업 또는 다른 활동에서 부주의한 실수를 저지름 

비교적 최근의 부주의다. 그날은 이브닝(오후) 근무였다. 데이(오전) 근무 간호사가 입원을 받은 환자가 PCD(pig-tail), 경피적 카테터 배액술, 경피적 농양 배액술이라 불리는 시술(피부를 통해 들어가 카테터를 이용해 체외로 농양을 배출시키는 시술)을 받고 왔다는 것이다. 인계 때 듣지 못했던 사실이라 부랴부랴 데이(오전) 근무를 한 선배에게 전화를 했더니 선배도 모르고 있었다. 병원 행정 담당 부서에 연락을 해 그 환자에 대한 소견서가 있냐 하니 있다 해서 받아서 사진을 찍은 후 선배에게 보내주었다. 소견서를 본 후 선배에게서 돌아온 대답에 내가 얼마나 주의력이 떨어지는지 알게 됐다. 


“아! 이거 진짜 귀찮은 거잖아. ~cc밑으로 안 나올 때까지 매일 drain(배액)하고 observation(관찰)하라는 거잖아?”


소견서를 직접 읽은 나는  ~cc이하가 될 때까지 배액 및 관찰이라는 문구를 발견하지 못했다. 소견서의 핵심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세부적인 것을 잘 못 보고 넘어가거나 놓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c. 종종 다른 사람이 직접 말을 할 때 경청하지 않는 것처럼 보임


사랑하는 사람을 속상하게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듣던 대사가 2개 있다.


너 내 얘기 듣고 있어?  
이거 저번에 얘기했잖아?

주변에 집중력을 흐리게 하거나 산만하게 하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얘기를 주의 깊게 듣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분명 방금 한 얘기인데 기억을 못 하고 되묻거나 하는 일이 있었다. 이게 몇 차례 반복되면 이윽고 저 대사들이 온다.


f. 종종 지속적인 정신적 노력을 요구하는 과제에 참여하기를 기피하고 싫어하거나, 저항함


휴대폰 계약서 내용을 잘 안 읽어보고 덜컥 계약해서 비싼 요금제를 계속 사용하거나 인터넷 이중 계약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그마저도 큰 피해가 아니니 보상받으려 이것저것 알아보고 전화하는 게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이 증상들은 내게 일상의 작은 지장과 불편함을 가져다주었지만 “귀찮다”를 이기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매사에 “귀찮다”라고 느끼는 것도 ADHD의 증상일 수도 있다고 한다.나는 그 증상들이 귀찮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프라다파우치 사건” 이후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진지하게 내가 우울증 말고 분명 다른 것도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책꽂이 제일 위칸에 꽂아 둔 벽돌 같은 책(DSM5)을 펼쳤고 ADHD가 머리를 스쳤다.  ADHD 장을 펼쳐 증상 “부주의”를 읽다 그중 내 상황과 꼭 들어맞는 증상을 찾아냈다.


g. 과제나 활동에 꼭 필요한 물건들을 자주 잃어버림


하긴 그 비싼 돈을 주고 산 파우치도 어디 둔지 모르고 그 난리를 치는데 다른 물건이라고 그러지 않았을까? 학교 다닐 때는 제출해야 하는 과제 집에 두고 나오고 한국은 이미 오토락이라 필요 없어졌지만 일본에서 살 때는 종종 열쇠를 잃어버리기도 했었고 직장에 벗어둔 겉옷을 안 입고 퇴근했다가 지하철 내린 후 쌀쌀하다 느낀 후에야 겉옷을 안 입고 돌아온 사실을 알게 된다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프라다파우치는 비싸긴 하지만 새로 사면 되고 열쇠는 오토락이 있고 겉옷이야 잠깐 춥고 말겠지만 다시 살 수 없는 건? 하면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근데 열쇠도 오토락이 고장 나면 어떻게 하지? 잠깐 추웠던 걸로 심한 고뿔이 들면? 덜컥 겁이 났다. 어떤 것을 잃어버리게 될까 모르는 그 "무지"의 상황이.


난 또 무엇을 잃어버리게 될까? 

되찾을 수 없게 되면?


이렇게 조금씩 견딜 수 없어진 두려움이 나를 좀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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