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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간호사 KokoA May 25. 2024

아픔의 열역학

사랑스러움의 엔트로피

26살 화학공학도 친구가 있다. 

34살 간호사인 나와 이 친구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둘이지만 책을 읽는 세계만은 비슷해서 종종 만나 카페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 이과 과목에 대한 흥미가 전혀 없었다가 이 친구를 사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커졌다. 이 사랑스러움은 과학에 눈길이 머무는 시간이 조금 길어졌다거나 조금의 궁금증이 내 손끝을 간지럽힌다거나 해서 관심도 없던(정확히 말하면 따분해하는) 과학 입문서, 과학 교양서를 찾아보게 했다.  

이런 것이 사랑스러워하는 것의 원동력.

열역학 제2법칙(The second law of thermodynamics)
전체 계(system)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변화 현상은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엔트로피는 일반적으로 보존되지 않고,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시간에 따라 증가한다. 정확한 열역학 제2법칙의 정의는 '우주의 엔트로피는 자발적인 과정에서는 항상 증가하고, 가역적인 과정에서는 변화하지 않는다.'이다. 출처: 생화학분자생물학회 생화학백과

엔트로피: 물리계의 무질서한 정도

사랑스러운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문득 책에서 본 ‘엔트로피’가 떠올랐다. 그래서 친구에게 과학책에서 엔트로피에 대해 읽었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 하니 씩 웃으며 내가 이해하기 쉽도록 청소와 물감을 예로 들어 엔트로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방을 청소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금세 짐이 늘어나거나 먼지가 쌓이잖아? 쉽게 설명하면 어지럽혀지고 무질서해지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거야. 근데 웬만큼 지저분하거나 더럽지 않으면 사실 그렇게 크게 신경 안 쓰고 지내잖아? 우주적인 관점에서는 그게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거지. 지금 이 순간도 우주는 증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물에 물감을 떨어뜨렸다 생각해 봐. 물감이 순식간에 물 위로 퍼져 나가잖아? 물감하고 물이 서로 잘 맞는 성질이니까 억지로 맞추지 않아도 그렇게 잘 섞이고 하는 거지. 그리고 섞이고 나면 계속 섞인 채로 진해지거나 하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고.”


청소 얘기만 들었을 땐 감정도 어쩌면 이 엔트로피와 같아서 우울 기질을 타고난 나는 늘어난 우울 속에서 아파하는 것이 어쩌면 안정적인 상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익숙한 걸 편안해하고 선택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만약 이 아픔이 나와 잘 맞는 성질이고 계속 증가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면? 난 이대로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았다. 이제야 겨우 숨 쉬는 게 편해졌는데. 살고 싶어 졌는데.

우주적으로 그게 안정적인 것이라면 안정 따위는 없어도 됐다. 그러나 물리학자 아서 스탠리 에딩턴은 “만일 당신의 이론이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배한다면, 빨리 포기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 이론은 아무리 고집해 봐야 희망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이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다.


과학도 결국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 

이 무쇠 같은 진리에 맞설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이란 건 없어져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리고 싶어졌다


그럼 유성 물감은?

과학을 하나도 모르는 내가 진리를 거슬러 보겠다고 부린 생떼는 고작 수성물감이 아니라 유성물감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수성물감은 물과 잘 어울리니까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이고 유성물감은 물과 잘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내 아픔이 수성물감이라면 유성물감으로 바꾸어서 엔트로피를 줄이겠다고.

차가운 과학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나면 사랑스러워진다. 그 사랑스러움이 28살의 친구를 다정한 어른으로 34살의 나를 생떼 부리는 어린아이로 만들었다.


물 하고 기름은 잘 안 섞이잖아?
그럼 잘 섞이게 물질을 넣거나
힘을 가해줘야겠지?
그걸 찾아내면 되지?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다정한 어른이 생떼 부리는 어린아이의 눈이 닿는 곳에 앉아 설명한 방법은 이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고립된 계에 한해서 성립하는 법칙이다. 그러니까 고립되지 않은 계에서는 엔트로피가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어떤 계의 엔트로피를 줄이려면, 외부에서 그 계에 물리적인 ‘일(work)’을 해 줘야만 한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일이란 쉽게 말해서 힘을 통해 에너지를 전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종필, 물리산책 중

친구의 설명에 안심했다. 분명 우울, 불안, ADHD 같은 마음의 아픔은 극복하기는 어렵지만 극복하기 위한 것들을 하면 분명 조금씩 내 아픔의 엔트로피도 줄어들 것이라고.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날 사랑스럽게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그 사람들을 위해 사랑스러워지는 것.


사랑스러움이 아픔을 누그러뜨리는 순간,

무질서하게 증가하는 게 우주의 법칙이라면

그 무질서는 사랑스러움만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감사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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