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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간호사 KokoA Jun 08. 2024

비로소 마이 닥터

믿음과 믿을 수 있음, 그리고 케이크 

MBTI가 나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묘사’에는 약하다. 내 주치의에 대해 설명하려 온갖 형용사를 다 갖다 붙여도 명쾌하지 않아 답답했는데 MBTI가 내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내 주치의는 대문자 ’T’인 사람이다. 내 주치의직면시키는 사람이다. 직면은 정신 의학, 심리학 용어로 내담자의 행동, 사고, 감정에 있는 불일치나 모순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주치의는 쉬운 말로 ‘팩폭’하는 사람이다. 말로 조곤조곤 조용히. 그게 더 무섭고 싫다. 차라리 혼을 냈으면.


한동안 치료를 중단한 적이 있다.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체중이 늘어서 약을 먹고 싶지 않아 치료를 피했던 것도 있지만 사실은 주치의가 살살 귀에 꽂아 주는 내 문제들이 더 싫었다. 그래서 면담은 되도록 안 했다. 어쩔 수 없이 면담을 하게 될 때는 수면제 용량을 조절할 때 정도였다. 


내가 다시 주치의를 찾은 건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선박기관사였던 전남자친구에게 보기 좋게 차인 후였다. 그것도 꼴에 ‘사랑’이라고. 꽤나 아팠더란다. 내 ‘아픔’이라고 부르는 ‘문제’들. 우울, 자살사고, 늘 나를 옭아 목을 조르는 돈, 전남편을 꺼냈을 때 ‘사랑’이 떠났다. 사실 설명하기 쉬우려고 ‘사랑’이라고 썼을 뿐 나는 그 선박기관사 분을 ‘사랑’한 적이 없다.(처음에만 전남자친구라 쓰고 그 뒤로 그를 지칭할 땐 일부러 다 뗐다. 전남자친구라는 관계성도 부여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선박기관사 뒤에 ‘분’이라는 높임말을 붙인 것도 정확히 선을 긋고 싶어서이다. 내 마음속에 너의 존재는 그 직업 정도라고.)


1년 중 제일 좋아하는 기간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기간부터 연말연시까지이다.

 이 기간은 나에게 케이크이다. 한해의 끝과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는 케이크. 겨울을 좋아하는 것도 이 기간에만 느낄 수 있는 끝의 아쉬움과 시작의 들뜸의 간격 때문이다. 나는 그 간격 사이에 머무는 게 좋았다. 

‘사랑’한다면서 선박기관사 분은('그'라는 인칭대명사마저 싫다) 내 케이크를 보기 좋게 뭉개고 갔다.


다시 주치의를 만나러 온 건 '케이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매년 ‘케이크’가 뭉개질 것 같아서.


나는 주치의에게 내 속을 싹싹 다 긁어서 꺼냈다. 

그 속에는 우울과 언제든 죽어도 되는 자살사고가 있었다. 그래서 내게는 내일, 다음, 미래 같은 ‘앞’의 말이 없었다. 그러니 모은 돈은 하나도 없고 빚만 있었다. 지금도 물론 빚만 있다. 그것들이 쌓이더니 불더니 나를 누르기 시작해서 옭아먹기 시작하더니 언제나 내 마음속에 살 것 같았던 그 사람, 전남편이 결혼하면서 숨통을 조여왔다.그때까지도 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늦게 죽어야 하니까 자존심 상하지만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나: 누가 저 같은 사람하고 결혼은커녕 연애라도 하려고 하겠어요? 보통 사람들이 보면 한심하겠죠? 

모은 돈 하나 없고 빚만 있고 누가 저랑 만나겠어요? 연애라도 하겠어요?


주치의: 누가 그래요?

나: 그러게요…(으앙). 그런데 선생님 저 외면해 왔던 것 같아요.

주치의: 뭘 외면해요?


나: 저 혼자서도 괜찮고 혼자 살 거라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필요한 거 같아요. 아, 참 그리고 전남편이 결혼했어요.

주치의: 어? 언제요?

나: 저 말 안 했던가요? 

주치의: 2달 전에 왔는데 왜 아무 말 안 했어요? 힘들었을 텐데. 전남편이 결혼을 해서 누군가가 필요해진 거예요? 

나: 그런 건 아니에요. 오빠도 결혼했고 언니도 결혼해서 너무 잘 살아요. 저만 이래요.  

주치의: 직면도 다 좋아요. 그런데 현진 님 우울감이 너무 높아요. 

나: 네?

주치의: 혹시 죽고 싶어요?

나: 아시잖아요. 저는 늘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주치의: 그래요. 알아요. 그래서 저는 현진 님이 죽을까 봐 걱정돼요. 


사실 그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었다. 뭐가 이 사람을 찔렀을까? 찔끔 한 방울 떨어진 건 진심. 진심은 마음을 움직였다. ‘언제든 죽어도 된다. 그러나 늦게’에서 ‘아, 살아야겠다. 천천히’로 바뀌었다. 

정신과 간호사인 내가 '내(my)환자'를 대할 때를 생각해보아도 정신과 의사인 그가 내게 했던 말, 감정적이 되었던 그 순간의 말, ‘왜 아무 말하지 않았냐고’ ‘네가 죽을까 봐 걱정이 된다고’하는 말은 단지 치료자가 아닌 친구나 다른 어떤 존재의 위치에서 하는 말이었다. 

비로소 그가 저스트 닥터(just doctor)에서 마이 닥터(my doctor)가 되었다. 


저스트(just)가 마이(my)가 되는 순간의 경험. 

그건 진심과 믿는 경험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진심과 스스로를 믿는 경험. 

타인에 대한 진심과 타인을 믿는 경험.

나의 우울은 진심이 없는 곳에서, 믿지 못함에서 왔음을 깨달았다. 가던 길을 멈춰 뒤돌아 서서 새로운 길을 택했다. 진심과 믿을 수 있음의 길. 


그렇게 긴 겨울이 끝났다. 

이르러 마침내 봄. 

우울증 '완치' 판정을 받았다. 

새로운 케이크를 사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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