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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미 Jun 09. 2023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찐따가 이 책을 읽으며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바로 토마스 산체스의 그림이다. 열심히 심취해서 읽다가 그림에 마음을 뺏겨버렸다. 찐따는 토마스 산체스의 인스타에 올려진 그림들에 푹 빠져 있다 정신 차리고 다시 책에 집중한다.

토마스 산체스 <내면의 풍경>

읽으면서 계속해서 찐따를 따라다녔던 생각은 요가를 다시 하고 싶다 이다.


작년 겨울에 3년 만에 헬스장에 등록을 하면서 gx프로그램에 있는 요가를 했는데 힘들었지만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내 몸에 집중하며 풀어주는 느낌을 너무 오랜만에 느껴서 좋았는데 그 후 한 달 반의 캐나다 여행으로 운동은 다시 흐지부지 해졌다. 명상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지만 요가를 하는 동안에도 명상을 하듯이 잡생각을 안 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걷기와 같은 유산소 운동을 하면 음악을 듣거나 잡념이 많이 생기는 편이다.(물론 생각이 정리될 때도 있다.) 잡념이 없어지는 순간 현재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생각을 어떻게 내려놓을까? 일단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합니다. 생각이 일어나도록 부추기는 유일한 요소는 바로 우리의 관심입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_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p.30>


요가를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호흡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호흡하는 시간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이다. 역시나 저자 비욘도 호흡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또한 동양인(태국인)과 서양인의 차이에 대해 적은 부분이 흥미로웠다.


쉽게 말하자면 태국 사람들은 제가 자란 문화권의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훨씬 더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환영한다고 진심으로 확신하는 서양인을 별로 만나본 적이 없었거든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_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p.45>


스웨덴에서 태어난 저자가 태국 사람들을 보았을 때 굉장히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들로 보인 모양이다. 사실 문화의 영향과 동시에 더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관광객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도 태국에 가면 우선 따뜻한 날씨 때문에라도 마음이 야들야들 해 지는 것을 느낀다. 같은 동양권인데도 아등바등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이 안쓰러울 정도다. 그러면서 마음의 병이 결렸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 어쩌면 그래서 이 책이 한국인의 마음을 건드렸는지도 모르겠다.


태국의 숲속 사원에서 7년, 영국에서 7년, 그리고 스위스. 17년이란 세월을 승려로 살아온 비욘은 돌연히 은퇴를 한다. 아무것도 없이 파란 눈의 승려로 오랜 시간 수행한 저자는 집으로 돌아와서 깊은 우울증에 빠져 스스로를 고립한다. 17년 만에 일반인으로 돌아왔으니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지 돈을 벌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다가 너무 빨리 변해버린 세상에 적응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이해할 수 없는 곳에 떨어진 기분이었을 것 같다. 그렇게 그는 18개월을 숨어 지내다 나와 서서히 명상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영어가 아닌 스웨덴어로 명상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큰 메리트가 되어 많은 곳에서 명상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자 영혼이 치유되는 것 같았고, 다시 조금씩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사회에 이바지할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_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p.194>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자 사회적 존재가 확실하다. 17년이나 수행한 승려도 사회 속에서 우울증에 걸릴 수 있으며 결국 사람들과 어울려 사람들에 의해 치유가 되니 말이다. 은퇴를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승려로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승려들과 함께 부딪치며 끊임없이 수행을 했을 것이다. 결코 사원이라 해서 혼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을 하던 10년 이상을 하면 전문가가 되는 것 같다. 남들이 가지 않는 흔하지 않은 길을 걸어서 비욘은 명상전문가가 되었고 때마침 스웨덴에서도 명상이나 내면의 평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고조되어 그는 여러 곳을 다니고 여러 매체를 통해 강연을 하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노력해서 꾸준히 하면 그 결실을 맺는 때가 다 있는 것 같다. 그럼 나는 언제? 나도 절에 들어가야 하나?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그는 2018년에 루게릭병을 진단받고 2022년 1월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셨을까? 어쩌면 아무도 경험해 보지 않은 죽음을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고 맞이할 수 있다면 그 삶 자체가 수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왜 우리 문화권에서는 죽음과 싸우고, 죽음을 저항하고, 죽음을 부정하는 것을 영웅적이라고 묘사할까요? 죽음을 왜 늘 무찔러야 할 적이나 모욕으로, 실패로 그려질까요? 저는 죽음을 삶의 반대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탄생의 반대에 더 가깝지요. 증명할 수 없지만 저는 늘 죽음 저편에 뭔가가 있다는 확신을 느껴왔습니다. 때로는 뭔가 경이로운 모험이 저를 기다린다는 느낌마저 들지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_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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