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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율 Sep 04. 2020

라벨 못 다는 사람

  드디어 대리로 진급한 친구에게 새 명함을 받았다. 만날 때마다 내가 기필코 여길 때려치울 거야, 말 거야 하더니 결국 친구는 큰 성취를 이뤘다. 그 애는 광화문에 있는 꽤 가격대가 있는 식당으로 날 불러냈다. 스산한 바람이 불었지만, 연봉협상 역시 성공해서 진급 턱을 내겠다는 친구의 말에 우리는 호쾌하게 웃으며 식당까지 걸었다. 겨울의 끝이 다가오는데도 거리에도 식당에도 반짝이는 장식들이 잔뜩 매달려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명함을 건네받을 때 작게 손뼉을 치는 흉내를 냈다. 나는 그 애에게 줄 명함이 없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먹고 있는 영양제와 부동산 이야기로 금방 넘어갔다.


  친구에게 줄 명함은 없었지만, 나에게 라벨 달기는 이제 제법 손에 익은 작업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큰 성취였다. 어떤 라벨을 가져와도 나는 (가끔 비뚤게 박힌 것도 있긴 했지만) 그것을 잘 박을 자신이 있었다. 라벨은 대부분 옷의 우라(안감) 뒤쪽에 달았는데, 간혹 옷의 와끼(옆선)에 끼워 인터로크로 박는 라벨도 있다. 라벨은 미싱의 자동 사절 기능을 이용하면 손쉽게 달 수 있다. 라벨의 세로 간격을 맞춰 바늘의 땀 수를 맞춘 다음 미싱에서 사절 설정을 하면 페달을 한 번만 밟기만 해도 박음질이 완성되었다. 보통은 라벨을 옷의 마무리 단계에서 달 거라고 생각하지만, 엄마는 혹시라도 라벨을 혼동해서 다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맨 처음에 작업하곤 했다.


  하루는 A 가게의 물건인 것 같은 셔츠에 B 가게의 라벨이 달려있길래 엄마에게 물으니 엄마가 화들짝 놀라며 그 옷들을 가져오라고 했다. 드문 엄마의 실수였는데, 그날은 운이 좋게도 내가 물건이 나가기 전에 그걸 알아차렸던 것이다. 큰 실수로 커지는 걸 막자 이모들이 눈썰미가 좋다고 나를 칭찬했다. 라벨을 잘못 다는 일은 간혹 있는 사고였다. 물건이 나가야 하는 가게의 이름을 혼동했다거나 애초에 사장님이나 가게에서 달아야 하는 라벨을 잘못 제공해줬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딸내미, 오늘 밥값 했네.”


  이야기를 들은 사모님 역시 나를 툭 치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는 괜히 멋쩍어서 다른 일을 하는 척했다.


  엄마는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기술을 배우는 게 최고’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 말이 가끔은 쓰게 들렸다. 엄마 말고도 다른 이모들이나 삼촌들도 엄마의 일을 배우려는 나에게 똑같이 이야기하곤 했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기술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사장님과 낯선 얼굴의 시아게(공장에서는 옷의 마지막 손질을 위해 미싱사가 만든 옷을 시아게 집으로 보냈다) 삼촌이 곧 있을 총선을 앞두고 정치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이 둘의 정치적 견해는 완전 정반대였다. 사장님이 어느 때보다 열띤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자 그것에 약간 지친 듯한 목소리로 삼촌이 말했다.


  “그렇게 얘기하시는데, 공돌이인 제가 뭘 알겠어요.”


  삼촌은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그 목소리는 곧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일자 박기로 원피스 허리에 고무줄을 박고 있었던 참이었다. 나는 미싱을 멈추고 곧 두 사람을 바라봤다. 공돌이란 호칭이 마음에 걸렸던 걸까, 아니면 그 상황을 피하고자 쓴 방법이 자신을 낮추는 일이라서 걸렸던 걸까. 엄마를 바라봤지만, 엄마는 여느 때처럼 열심히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또 다른 날엔 엄마와 친한 아주머니가 자신의 남편을 데리고 공장에 방문했는데, 아저씨가 엄마 옆에 나란히 앉아 라벨을 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물었다.


  “대학까지 나왔는데, 자존심 상해서 이 일 하겠어요?”


  이 말은 내가 미싱을 배우기 시작한 후 들은 말 중에 가장 상처가 된 말이다. 나는 순간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게 앉아있었다. 설마 나에게 그런 질문이 쉽게 올까 싶었는데 정말 눈앞에 맞닥뜨리고 나니까 할 말을 잃은 것이다. 도대체 대학 나온 거랑 미싱 배우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대학 나오면 미싱 돌리면 안 되는 걸까? 그게 이상한 일일까? 혹시 다른 사람들도 다 저렇게 날 바라볼까? 끝도 없이 생각하던 나는, ‘도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까지 와 버려서야 생각을 겨우 멈췄다. 멈추지 않았으면 내 안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게 뻔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고 금세 웃음으로 넘겼지만, 어느새 나에게 달려버린 라벨이 신경 쓰였다. 사실 전부터 달려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 존재를 이제야 제대로 확인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걸 단 사람이 나인지, 다른 사람인지 헷갈리면서 그 라벨을 한참 매만졌다.




  빛나던 조명 아래에서 친구에게 새 명함을 받았을 때도, 간혹 한 번씩 나가던 모임에서 나보다 어린 후배들의 직장생활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목을 축였던 때도 나는 내 목덜미 뒤에 달린 라벨을 만지고 있었다. 유난히 까슬까슬했다. 나에게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군가 물어오면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우선은 미싱사라는 직업을 쉽게 이해시키기 힘들었고,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건지 설명하려면 장황해졌다. 물론 처음엔 돈 때문에 미싱 앞에 앉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가다 보니 그것 외에도 얻어가는 것들이 많았다. 내 또래가 아닌 엄마 세대의 사람들과 일하며 그들의 언어와 생각, 노하우를 배웠고, 몸으로 익히는 노동이 무엇인지 배웠다. 엄마 밑에서 일하다 보니 근무시간을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엄마와 일을 하며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나는 미싱을 배우며 이전엔 얼굴을 맞대기도 힘들었던 엄마와 매끼 밥을 먹고 쉬는 시간엔 수다도 떨었다. 일을 쉬는 사이사이엔 글을 쓰고 취미생활을 하고, 날씨를 느끼고, 쾌청한 하늘을 보며 공상을 하기도 했다.


  라벨을 비뚤게 박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였다. 미싱을 배우며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그들에 말에 위축될 때도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엄마를 보며  위안을 얻었다. 엄마는 내가 어려서부터 서른이 넘긴 지금까지 미싱사다. 그동안 엄마는 성실히 노동을 해왔고 돈을 벌었다. 다른 이모들과 삼촌들이 스스로 공순이, 공돌이라고 이름 붙이며 한탄해도 내가 지금껏 보아온 엄마는 그랬던 적이   번도 없었다. 엄마는  일을 하며 우리 남매를 키웠고 자신에겐 뭐니 뭐니 해도  미싱 기술이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엄마의 자부심이 나를 벅차오르게  때도 많았다. 이전엔 라벨은 내가 선택할  있는  아니라 주어지는 것으로 여겼는데 엄마를 보며 나는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 미싱은 내가 선택한  라벨이었다. 여전히 미싱은   돌리지만, 나는  라벨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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