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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율 Sep 13. 2020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

  종현 씨, 안녕하세요. 날이 화창한 오후입니다. 긴 장마로 얼룩진 여름이 끝나고 이제 가을의 초입에 서성거리는 날이 이어지고 있어요. 잘 지내고 있나요? 생각해보니 이렇게 직접 말을 걸어보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네요.


  처음 당신의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날은 일하던 학원의 겨울학기 개강 날이었고, 당신의 부고가 들렸을 즈음엔 아이들을 교실로 밀어 넣은 다음이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어요. 그 많은 아이가 등원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믿기 힘든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당신의 얼굴을 쉽게 떠올리기가 힘들었어요. 얼굴만 유독 떠올리기 힘들더군요. 문득 당신이 살아서 방송에 출연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스쳤어요. 살아서 움직이는 당신의 모습. 같은 그룹의 다른 멤버가 춤추는 모습을 본 적은 있어도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노래하는 당신의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거죠. 내가 기억하는 건 당신의 말하는 목소리 뿐입니다.


  당신은 라디오 DJ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청취자와 함께했죠. ‘쫑디’로 살았던 시간은 당신에게 어땠나요? 당신의 라디오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학교에서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유독 힘든 일이 많았어요. 잊고 싶은 기억들이 많았어요. 잊고 싶지만 사소한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 때가 많았어요. 죽고 싶었어요. 그때 우연히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겁니다. 사실 당신의 목소리가 낮 시간대의 라디오 진행보단 저녁이나 밤 시간대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이돌인 당신이 그렇게 늦은 시간에 라디오 부스를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어느 날은 디어클라우드 나인 씨와 함께 진행했던 코너가 제일 좋았습니다. 또 어느 날은 소란 고영배 씨와 커피소년 씨와 함께 진행했던 코너가 제일 좋았습니다. 옥상달빛과 함께 하는 시간도 제일 좋았습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청취자들의 사연을 읽어주며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당신의 목소리가 제일 좋았습니다. 가끔은 염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자신의 우울을 숨기지 않았지만 저는 그게 제일 좋았습니다. 말이 안 되지만 모두 제일 좋았습니다.


  기억력이 좋아 아무것도 잊지도, 흘려버리지도 못할 때 저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라디오 다시 듣기로 아무 날짜나 재생하고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합니다. 틈틈이 유서를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아 말을 고르기도 했지만 그게 당신의 목소리 앞에선 무력해지더군요. 서너 줄 적힌 글자 위로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습니다. 남동생과 키우는 반려견 까미의 옆얼굴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오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떠다니다가 사라졌습니다.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게 괴로워서 내가 다시 세상에 태어나도 우리 다시는,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기도하며 잠들었습니다.


  사실 당신에게 하는 지금 이 이야기가 조심스러운 것은, 저는 당신을 좋아하지만 지금껏 누구에게도 당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쉽게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제가 죽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당신의 등장을 경계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죽고 난 뒤 당신의 음반과 책을 사고 포스터를 사고 밤마다 당신의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죠. 처음엔 같은 그룹의 다른 멤버를 좋아해서 그렇다고 변명했지만, 엄마에겐 그 변명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말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아는 사람이 아니잖아.”


  저는 당신이 살아있을 때 당신의 열렬한 팬이었던 적이 없어요. 열렬하다는 말이 가끔 내 발목을 붙잡아서 할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너 원래 그 사람 좋아했었어? 그냥 그 사람이 죽었다는 이유로 감정 이입하는 거 아니야? 그럴 때마다 과거에 주파수는 맞췄지만 한 번도 사연을 보내거나 메시지를 보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나서야 당신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르고 한 번도 보지 못한 당신의 무대를 보며 제발 이 세상에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살아있을 때 지지했던 팬도 아니었던 제가 지금에 와서 당신을 추억하고 그리워한다는 게 한편으론 위선이라는 생각도 하면서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것을, 사람을, 목소리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게 살아서 무슨 소용이겠어요. 누구보다 나의 마음이 진짜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엄마의 말에 무너지고 그 마음을 ‘열렬히’란 말에 저버리고 나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아마도 너와 난 꼭 그때가 아니었더라도 너와 난 분명 만났을 거야(종현, <1000>)’라고 노래 부르던 가사 속에서 내가 더 이상 유서를 쓰지 못했다는 게, 제일 좋아하는 코너들을 들으며 깔깔 웃고 공감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요.


  당신의 부고가 들려오던 밤 저는 익숙한 시간에 라디오를 켰습니다. 오프닝에서 당신의 후임 DJ가 울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 뒤로 이 노래가 흐릅니다.     


  그럴 수 없이 사랑하는 나의 벗 그대여

  오늘 이 노래로 나 그대를 위로하려 하오

  하루하루 세상에 짓눌려 얼굴 마주 보지 못해도

  나 항상 그대 마음 마주 보고 있다오     

  겨를 없이 여기까지 오느라

  손 한 뼘의 곁도 내어주지 못해

  불안한 그대여

  나 그대 대단치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오

  …(중략)

  이 노래가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오

  ― 강아솔, <그대에게>     


  이 짧은 노래가 흘러나오던 시간을 저는 잊지 못할 거예요. 한없이 재생될 거예요. 그럴 때마다 당신의 평안을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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