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그날은 PMS(월경전 증후군) 증상이 극심한 하루였다.
하늘하늘한 소재의 옷감은 내가 제일 만지기 싫어하는 옷감이었다. 일이 서툰 나에게 그런 옷감은 손으로 잘 잡히지도 않을뿐더러 미싱으로 박으면 실이 예쁘게 박히지 않고 옷감이 자꾸 바늘땀에 울어서 한시라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우리가 흔히 만질 수 있는 블라우스나 원피스 옷감을 생각하면 된다. 여성복을 만드는 우리 공장에서는 봄철 원피스를 한창 만들어 내고 있었다. 스타일이 조금씩 다른 원피스를 온종일 만든 날이면 길가에 비슷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만 봐도 고개를 돌려버릴 정도로 나는 원피스에 질려버렸다.
사실 원피스를 만들 땐 미싱보단 인터로크로 작업해야 할 부분이 많아서 내 손을 거치는 부분이 거의 없었는데, 어느 날은 엄마가 치마 부분의 우라(안감)와 오무데(겉감)를 주며 인터로크로 박기 전 작업하기 쉽게 미싱으로 그 둘을 겹쳐서 이어달라고 말했다. 미싱의 도메(마무리) 옵션을 끄고 나는 천천히 우라와 오무데를 겹쳐서 박기 시작했는데, 우라는 미끈거리고 오무데는 하늘하늘해 손에 잡히지 않아 자주 놓쳤다. 얇은 옷감이라서 그런지 자동사절도 잘되지 않았다. 곧 나의 기분은 발끝까지 내려가고 스트레스는 머리끝까지 올라왔는데 시킨 일을 어찌할 것인가, 그냥 해야지. 손이 느린 탓에 치마 하나를 박을 때마다 5분 이상 걸렸는데 울고 싶었다. 내 손마저 날 배신한 듯한 느낌. 세상 내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날따라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고 자꾸만 어디든 눕고 싶길래 나는 또다시 깊은 우울이 날 덮쳐온 줄 알았다. 약도 잘 먹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는데도 왜 또 이럴까 싶어 맥이 자꾸 빠졌다. 그렇게 나는 6시 퇴근만 바라보며 손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원피스 옷감이 또 새로 들어왔다. 사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단을 준비했고, 나는 질리다 못해 엉엉 울고 싶어졌다.
나는 퇴근 시간을 한 시간 앞두고 또다시 치마의 우라와 오무데를 잇기 시작했다. 차라리 다른 일을 맡았다면 덜 지쳤을 텐데 그걸 몰라주는 엄마가 괜히 야속했다. 잠시 옷감을 내려놓고 미싱 아래 발끝을 내려다봤다. 엄마한테 그냥 간다고 이야기할까? 그럼 또 내 기분을 걱정할 텐데. 책임감도 없어 보이고. 나는 이런저런 갈등 속에서 손을 놀리느라 자꾸 옷감을 놓쳤고 그 때문에 짜증이 점점 더해졌다. 죽고 싶다. 이 생각이 든 건 찰나였다. 이 짓을 할 바엔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 잘하지도 못하는데 왜 엄마는 자꾸 이런 일만 나한테 시킬까? 내 기가 죽기를 바라는 건가? 내 생각은 자꾸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결국 쥐고 있던 옷감을 내려놓고 미싱을 껐다. 먼저 가겠다고 말하는 나의 얼굴을 바라보던 엄마는 곧 그러라고 말했다. 내 생각을 다 읽은 듯 굳은 표정이었다.
평소에 퇴근하려면 성신여대입구역까지 20분 정도 성북천 길을 걸어서 가야 했는데,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나는 집으로 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택시를 타기엔 길이 너무 막힐 것 같고……. 이미 방법을 알면서도 나는 지하철 앱을 열어 이리저리 길을 찾았다. 그리고 문득 나는 한강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으로 그런 건 아니고 불현듯 끝없이 펼쳐져 있는 물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2018년 6월, 나는 한강에서 뛰어내리려고 계획을 세우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었다. 자살미수의 미수랄까. 외래진료를 받으며 보호 병동 입원 대기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후였고,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그날 응급실에서 그대로 보호 병동으로 이동한 나는 나의 시도와 증상을 하찮게 여겼다. 그곳엔 (경중을 따지자면) 나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의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에 죽지 못했으니까 된 거 아닌가. 나는 나의 아픔을 누구보다 냉랭하게 바라봤다.
한강에 가려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는데, 그 직전 역인 동대문역에서 내리고 말았다. 왜지. 착각한 거라기보다는 그냥 생각 없이 내렸다. 나는 나의 멍청함에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다. 친구와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하다가 나의 상태를 이야기했는데 가볍게 받아들이기에 더 화가 나서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고 휴대폰을 껐다. 아,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내가 갈 수 없는 곳은 없다고 생각하며 공장을 나왔는데 갈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공장 문을 열고 나오며 마주쳤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 중 누군가가 먼저 죽으면 그건 배신이나 다름없어. 병동에서 퇴원한 후 나는 수시로 똑같은 문장을 떠올렸고, 때때로 그 문장에 눈물을 훔쳤다. 나는 엄마를 보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배신'이라는 단어가 경우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나의 상황에 딱 맞는 다른 말을 찾기는 어려웠다. 생에 대한 미련을 씻어내고 죽으려던 나를 살린 건 엄마다. 나와 병동 소파에 앉아 조용히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어주었던 것도 엄마고, 일로 바쁜 와중에도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 간식을 챙겨주던 사람 역시 엄마였다. 이후 나에게 살아있어 기특하다고 해준 것도 엄마다. 나는 그런 엄마의 손길을 곱씹으며 자살 충동으로 얼룩진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마음을 고쳐먹어야 했다. 그러니 이렇게 나를 살려두고 먼저 죽는 건 보통 배신이 아니었다. 엄마의 노력에도 퇴원 이후의 나는 한동안 춥고 밤이 일찍 찾아오는 계절에 머물러야 했다.
우라와 오무데 말고도 무언가를 잇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든 것인지 가만 생각할 때가 많다. 생과 죽음을 잇는 것은 또 어떤가. 살아야 하는 이유와 죽어야 하는 이유는 왜 이렇게 팽팽히 맞서 날 힘들게 하는 걸까. 늦더라도 천천히, 하나하나 잇다 보면 무언가 완성된다고 말하는 말을 믿어야 하는 걸까. 지금은 느리지만 곧 괜찮아질 거라는 말은 어느 순간부터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결국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