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율 Sep 03. 2020

카우스 못 만드는 사람

  내가 엄마를 처음 불렀을 때는 언제일까. 아마 그것은 ‘어’나 ‘음’, ‘마’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쉽게 이어지지 않는 음절의 사이사이. 나는 늦된 아이였기 때문에 그 소리가 온전한 ‘엄마’ 소리가 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문득 설거지하는 엄마의 등에 대고 묻고 싶어 진다. 엄마는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 나는 언제부터 엄마 소리를 했어?”


  엄마는 웃으며 대답한다.


  “넌 뭘 해도 늦었어.”


  보호병동에 입원했을 때, 엄마는 매일 일하는 틈틈이 나의 병실로 찾아와 간식을 채워주고 의사와 면담을 했다. 나와 엄마는 병실 앞 소파에 앉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을 말없이 듣곤 했다. 그때부터일까. 나는 괜히 부르지 않아도 될 엄마를 부르는 일이 허다해졌다. 민망했던 일을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질 때, 피어싱을 뚫거나 타투를 하고 싶어 질 때, 혼자 산책하기 싫을 때, 집안일을 하지 않는 아빠에게 뭐라고 하고 싶어 질 때. 창피하거나 고민하거나 갈등하거나 화가 날 때마다 나는 대신 엄마를 부르는 것이다. 그럴 때면 엄마는 늘 왜냐고 묻는데 나는 대답할 때도 있고 대답하지 못해 그냥, 하고 얼버무릴 때도 있다. 엄마는 기억할까. 내가 언제 엄마를 처음으로 불렀는지.


  옷의 팔 부분을 만들려면, 우선 인터로크로 팔 부분의 옷감 양 끝단을 3분의 1 정도 박고 카우스(소매)를 따로 만들어뒀다가 팔 부분과 카우스를 합봉해야 한다. 길게 자른 천을 가로로 네 등분해 접어 아이론(다리미)으로 다린 후 일정한 길이로 자르면, 박음질하기 직전의 카우스가 만들어진다. 자른 카우스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려면 안감 방향으로 뒤집은 후 양 끝을 반 인치(inch) 정도 안쪽으로 박아 뒤집으면 된다. 원리와 방법은 다 이해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팔 부분과 카우스를 합체하는 것은 할 줄 모른다. (사실 배웠는데 어려워서 일단 포기했다) 엄마는 단숨에 카우스 박기를 끝내지만, 나처럼 작업 속도가 느린 사람에겐 카우스 박기 역시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다림질된 카우스의 끝을 한 번 박고 각이 잡히게 뒤집으면 하나, 반대쪽 끝을 한 번 박고 각이 잡히게 뒤집어 둘. 소매는 두 개가 한 벌이기 때문에 셔츠 10장이라면 총 20개의 소매를 작업해야 했다.


  “그걸 아직도 하고 있어?”

  “어…….”


  이번에도 엄마의 작업 속도는 너무 빠르고 나는 그것을 뒤쫓기 바쁘다. 합봉 직전까지 가서야 나는 카우스를 겨우 완성하고 엄마에게 내놓았다. 이번엔 합봉하기 좋게 카우스를 차곡차곡 한쪽 방향으로 놓아두지 않았다고 엄마가 나에게 뭐라고 했다. 어차피 확인해가면서 합봉해야 하는데, 나는 엄마가 과하게 꼼꼼한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래야만 더 빠르게 작업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게 빨라져 봤자… 1초 정도 더 빨라지려나? 느린 나는 그 1초를 생각하면 답답해져 오는 것이다.


  엄마가 죽을까  무서워진  병동에서 퇴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누구나 부모와의 이별을, 그에 따른 공포와 슬픔 같은 것을  번쯤 미리 느껴봤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닥칠  순간을 비껴갈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이런 생각이 수시로 지속된다는 거였다. 나는 엄마의 현재 위치를 병적으로 확인해야 했고, 엄마에게 혹시라도 불시에 닥칠  있는 사고나 질병에 민감해졌다. 아프기 이전엔 별로 그런 생각을 해본  없었는데, 나는 누구보다 독립적으로 자랐는데. 아프고 나서 나는 전엔 없던 엄마와의 분리불안이 심해졌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엄마와 함께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질 때도 었다.


  말로 내뱉은  없지만, 나의 과거 자살미수의 미수 사건 때문에 부모님과  사이엔 어쩔  없는 죄책감 같은 것이 끼어들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그렇다고 비범하다고도 생각하진 않는다) 부모 자식의 사이라기보다는  죄책감 때문에 나에겐 공포가, 부모님한텐 책임이  커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책이 출간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책을 읽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아마  울음엔 대부분 미안함이 녹아있는  같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미안함이 미안하다. 우리는 아마 이렇게 평생을  것이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일을 끝내고 집으로 퇴근해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데, 엄마가 내 옆에 앉더니 그날 했던 작업을 다시 정리해서 이야기해줬다. 이 작업은 이런 식으로, 저 작업은 저런 식으로 하면 된다고 말이다. 나는 일이 끝났는데도 일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엄마가 1초라도 더 빠르게 일을 하려는 엄마와 겹쳐 보이면서 견디기 힘들었다.


  “어떻게 해도 난 너무 느리고 못 하잖아.”

  “처음이니까 그렇지.”

  “벌써 몇 달이 지났어.”


  내가 입을 삐죽이며 몇 마디 하자 분위기가 싸해졌다. 일부러 엄마한테 상처 주려고 한 말은 아닌데. 나는 엄마도 기분이 상했을 것 같아 별말 안 하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엄마가 말했다.


  “난 이제 네가 빠르면 빠른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둬.”


  정말? 나는 몰랐는데.


  “빠르면 빨라서 좋다고 생각하고, 느리면 원래대로 느리구나 하고 생각해. 그게 맞잖아”


  엄마와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는 왠지 울컥해서 앞서 걷는 엄마의 카우스를 붙잡고 싶다. 영원히 나와 함께 살자고, 우린 죽지 말자고, 아픈 나를 이렇게 살려뒀으면 그게 맞는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다. 엄마는 그 얘기를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항상 그렇듯 나에게 미안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사실 그냥 1초라도 엄마와 더 함께 있고 싶은 것이다. 그것뿐이다.


  나는 언제부터 엄마를 엄마라고 불렀을까. 엄마도 나도, 그 누구도 그것을 기억 못 한다고 해도 나는 사랑에 여러 소리가 있다고 믿는다.

이전 11화 도망치지 못하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