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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율 Sep 02. 2020

도망치지 못하는 사람

  “살면서 제일 힘들다고 했던 때가 언제였지?”


  이전에 내 입을 통해 들은 것 같지만 잘 기억이 안 난다는 듯, 내 앞에 앉은 사람이 무심히 볼을 긁는 나에게 물었다. 지금? 장난하지 말라는 그의 말에 나는 곧 생각에 잠겼다. 그게, 그러니까…. 나는 도대체 언제를 꼽아야 할지 몰라서 잠깐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학과 조교 시절! 그랬지, 그때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나와 내 앞에 앉은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놓인 음료로 목을 축였다. 그건 왜인지 목을 축여야만 말할 수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2014년 3월부터 2016년 2월까지 2년간 모교에서 학과 조교로 일했다. 그때의 나를 돌아보면 떠오르는 단어 하나, 타타리가미. 이것은 영화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에 등장하는 재앙신을 뜻하는 말이다.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는 중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 도서실에서였는데, 아주 유명한 일본의 영화감독 작품이라는 것만 알고 영화를 봤다. 잘은 모르지만 강렬한 느낌의 포스터 그림체와 색감이 마음에 들어서 기대하며 봤는데, 영화 처음에 등장한 것이 바로 재앙신이었다. 인간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가득 찬 채로 이곳저곳 돌진해 마구 들쑤시고 다니는 재앙신은 등장과 동시에 남자 주인공에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제압당하는데, 나는 그 장면이 실사가 아니었음에도 끔찍한 실사의 무언가를 본 듯 몸서리쳤다.


  “그걸 뒤덮은 게 인간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라는 게 포인트야.”


  조교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별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마침 학교에서 학사 조교를 구하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4년간의 대학 생활에서 수없이 깨져버린 내 인간관계와 얼룩진 기억들을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 조금은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두 학번 선배에게 인수인계를 며칠에 걸쳐서 받았다. 몇 번 공문 쓰는 법도 알려주고 여러 서류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나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조교로 근무하기 전날 밤, 그다지 친하지 않은 선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야, 이게 무슨 일이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넘쳐나는 ㅋ을 보면서 이게 그렇게 별일인가 싶었지만, 곧 답장을 했다.


  우리 학과 사무실은 특별한 곳이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조교 선생님’이기도 했지만, 친한 ‘선배’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게 동시에 취급됐다는 점이다. 나는 아이들과 학과 사무실을 공유하길 바랐다. 그곳이 딱딱하고 어려운 분위기의 사무실이 아닌 친숙한 곳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랐다. 혹시라도 학생 개인이 힘든 일을 겪을 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아이들은 학과 사무실에서 과제를 하거나 수업에 대해 공유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수다를 떨거나 했다. 한 마디로 사랑방 분위기의 학과 사무실이었다. 가끔 타과의 선생님들이 나에게 볼일이 있어 학과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잘못 들어온 줄 알고 사과를 하며 나가기도 했다. 애들이 나를 선배로서 친근하게 대해 주는 건 좋았는데, 나는 동시에 일을 해야 하는 조교 선생님이기도 해서 종종 난감한 일이 있었다. 교수님과 수업이나 학과 통폐합과 관련해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 학생들의 개인정보나 가정사나 비밀 이야기를 원하지 않게 듣게 됐을 때, 본관에서 근무하는 선생님들과 업무 관련 전화 통화를 할 때 말이다. 나는 자주 아이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이야기하며 일을 처리했다.


  나는 쉽게 번아웃이 오는 성격이다. 흔히 말하는 ‘멘탈’이 약한 사람. 학부 시절, 나의 별명은 쿠크다스였다. 쿠크다스 과자처럼 정신이 부스러지기 일보 직전으로 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보통은 수업과 과제 때문에, 부수적으로는 동아리 활동과 학과 학생회 활동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도망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주어져도, 그것이 심하게 무리를 주는 일이라고 해도 나는 울면서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꼭 학교가 아니었어도 근무했던 직장마다 난 늘 그런 자세를 유지해왔다. 내 정신은 늘 불안 불안했다.


  나는 점점 재앙신이 되어갔다. 사람들로 인해 힘을 얻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쌓여갔다. 존경했던 교수님은 나에게 공적인 업무 말고도 개인적인 업무까지 시키기 시작했다. 집행부와 합심해 학과 행사와 학술제를 진행해야 했다. 나는 나보다 두 학번 선배인 학회장과 무섭게 싸워댔고, 곧 다른 학생들과도 싸웠다. 모두 다 친한 사이였기에 가능했다.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을 것처럼 싸웠고, 나는 그때마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크게 타격을 받았다. 자업자득이었다. 2년 계약이 끝나고 퇴사를 하자마자 나는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극도로 화가 나면 필름이 끊긴 듯 기억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나는 지금도 무서워. 내가 또 그때처럼 멈추지도, 도망치지도 못할까 봐.”


  나는 재앙신이었던 사람. 치료를 받으며 나는 겨우 제 몸으로 돌아왔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지. 내가 어릴 적부터 늘 들어왔던 충고다. 지구력이 부족해 일을 벌여놓고 잘 수습하지 못하는 나에게 아빠는 자주 그렇게 이야기했다. 생각해보면 아빠 말고도 어른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거기에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도 덧붙였다. 미싱을 배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아빠는 날 말렸다. 넌 행동도 느리고, 몸으로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건데 그걸 모르고…. 아빠가 보기엔 돈 때문에 미싱을 배우고 싶다고 하는 내가 무책임하고 철없어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르지 않나. 아직 나는 아무것도 안 해봤는데. 아빠의 말이 서운했지만 난 애써 넘겼다.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종종 미싱을 돌리며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워서 무서워서, 질려서 나는 도망치고 싶다. 어느 날엔 엄마에게 미싱사를 관두겠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며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나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젠 잘 도망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고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제목의 드라마도 있지 않은가.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고. 학교에서의 경험은 많은 시간 나를 괴롭혔지만, 나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나에게 버티지 못하는 사람은 살아남지 못한다고 얘기했던 어른들의 얼굴을 꼬집어주고 싶다. 그 말은 다 틀렸다고 대답하면서 힘껏 볼을 쥐고 흔들고 싶다.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저도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해보고 아니면 도망치면 됩니다. 내가 아닌 것에서 힘껏 도망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미덕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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