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이 없는 날이 며칠째 지속되고 있었다. 나와 엄마는 매일 사장님의 출근하라는 연락을 기다리며 집에 머물렀다. 그날은 오후에 원단이 배달된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출근을 했다. 공장에 도착하니 우리가 가장 먼저 출근해 있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일을 시작하기 전 간단히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공장으로 원단이 배달됐다. 함께 배달된 큰 까만 봉지가 눈에 들어와 열어보니 그 안에도 원단과 지퍼, 라벨과 같은 부자재가 꾸깃꾸깃 들어있었다. 봉지 안에 동여맨 또 다른 하얀 봉지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거침없이 봉지를 열었다. 그 안에는 우리가 이전에 내보낸 원피스와 셔츠 몇 장이 들어있었다. 그때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는 듯) 엄마가 나에게 나오시가 없냐고 소리쳐 물어봤고, 나는 순간 이것이 나오시감이구나! 알아차렸다. 나오시는 고쳐야 하는 옷으로, 잘못 만들어진 옷이 공장으로 되돌아오면 우리가 다시 고쳐서 내보내는 식이었다.
“일도 없는데 나오시만 많네.”
어느새 출근한 성북구청 이모가 봉지 안을 뒤적거리며 이야기했다. 일이 없어지자 공장 안의 공기는 왠지 냉랭해졌다. 나를 제외한 모두의 말수가 줄었다. 일감을 나눌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그랬다. 딸내미라고 부르는 소리도 줄어들었다. 어느새 엄마와 이모가 나오시감을 몇 장씩 나눠 가지고 자리에 앉아 그것을 고치기 시작했다.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어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건 누가 실수한 거야?”
“그야 모르지.”
엄마는 박음질된 옷을 뜯으며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누가 실수한 건지 알아야 그 사람이 고치는 거 아니야?”
“그런 건 안 중요해.”
엄마는 누가 옷을 잘못 만들었든지 어차피 고쳐서 다시 내보내야 하는 옷이고, 이것을 재빨리 해결하고 다른 일을 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괜히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엄마가 옷을 뜯는 것을 도왔다. 어느새 성북구청 이모가 내 옆으로 와서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줄여서 이야기했다. 옷을 뜯다 보면 일이 금방 는다고 말이다. 나는 조금 더 성실하게 옷을 뜯기로 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그만두고 모교의 학사 조교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조교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다시 학교라는 공간으로 돌아가 생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학부 시절 내내 10대 때 갖고 있었던 예민함과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한껏 날이 선 상태로 지냈다. 원하는 학과에 진학해 공부했고 학과 집행부, 동아리 활동에 전념하며 사람들과 교류했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는 하지 않을 실수를 반복하고 사람들과 싸우고 다녔다. 결국, 졸업할 즈음엔 내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나는 조교로 근무하면서도 다시 이곳에 돌아온 걸 후회했다. 다행히 근무하며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과 잃었던 사람에 대한 허기짐이 조금씩 채워지는 걸 느꼈지만, 여전히 비슷한 실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주 일에 치였고 여유를 잃었고, 사람들과 싸웠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릴수록 애초에 모든 것에 어색하고 완벽하지 못한 나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겨우 이런 사람이면서 끊임없이 일을 망치기 전으로, 사람들과 싸우기 전으로 다시 되돌리고 싶어 하는 나 역시 싫었다.
엄마와 이모의 미싱 경력을 합치면 70년 정도 된다. 나는 옷을 뜯으며 이 정도의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도 실수를 한다는 게 새삼 놀랍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실수라는 걸 하는구나. 30년이 넘는 시간이면 어떤 일이든지 완벽하게 해낼 줄 알았다. 나오시감을 들여다보면 밑단이 제대로 말려 박히지 않았다던지, 소매통이 물렸다던지 하는 비교적 간단한 작업에서도 실수가 나왔다. 애초에 사장님의 재단에 실수가 있어 나오는 나오시감도 있었다. 아무래도 많은 양의 옷을 정해진 시간 안에 빠르게 만들어내서 내보내야 하는 일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오시가 나올 때마다 엄마와 이모들은 다시 성실하게 옷을 고쳐냈다. 이 일 역시 미싱사가 해야 하는 일의 하나이고 과정이므로. 엄마의 집중하는 모습이 새삼 달라 보였다.
나에게 '다시'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가 완벽한 사람이기를 바랐다. 지난날을 용서받고 만회하고 싶었다. 매번 하는 언행과 행동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서 어떤 실수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난 늘 내 기대보다 부족했고 나는 수시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휘둘렸다. ‘다시’ 하면 잘할 수 있을 텐데, ‘다시’ 만나면 누구보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될 텐데. 이런 섣부르고 어딘지 모자란 확신을 쉽게 하면서.
사실 잘못된 옷을 뜯는다고, 그것을 고치는 과정을 지켜본다고 실력이 금방 는다는 이모의 말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오시를 고치고 실수를 바로잡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를 ‘다시’ 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저 어떤 태도임을 깨달았다. 실수 앞에 놓인 단정한 태도.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실수를 그것 그대로 흘려버리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다시 바로잡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여태껏 이러한 나의 태도를, ‘다시’ 하고 싶다는 마음을 증오하며 지냈다. 하지만 실수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것은, 그래서 더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노력이었다. 분명 내가 ‘다시’ 선택했기에 아물고 봉합된 상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다시 해보겠다고 마음먹는 나를 스스로 모자라거나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느새 엄마는 나오시를 다 고치고 새로운 일감이 주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엄마의 옆얼굴을 보며 속이 후련해졌다. 기지개를 켜다가 사장님이 가져다주는 일감을 엄마에게 옮겨주었다. 나는 이날 그동안의 자책과 창피를 구원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