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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 Jul 16. 2021

산벚꽃 피면

  산벚꽃이 핀다. 삼십여 년 전에도 피던 꽃이다. 아니 그 이전에도 피었던 꽃이다. 다르다면 그때는 산벚나무가 아기 나무였다. 지금은 갈맷빛 침엽수들과 연둣빛 새잎들 사이에서 어깨를 견주며 온 산에 반, 반으로 그득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아름다운 풍광을 마주하면 내력 없이 가슴이 설렌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절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올봄처럼 산벚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던 날이었다. 함께 출근하던 승용차 안에서 운전을 맡은 선생님이 말했다. “오메! 산벚꽃 피네요. 참 곱구먼요, 잉.” 

  자못 감흥에 젖어 아침 인사 겸 건넸다. 나도 먼 산빛을 한 번 바라보고 반갑게 응수하려던 터였다. 그런데 조수석에 탔던 선생님이 휙 앞지르기를 했다.

  “곱기는 뭣이가 고와? 아, 못 먹고, 못 살던 시대 잊었어? 그때 우리 머리에 희뜩희뜩하게 난 도장밥 같구만.” 

  “흡!”

  이 기상천외하거나 뜬금없는 일갈은 무엇인가? 하지만 아무도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도 보였다. 엄동을 거쳐 온 상록수들의 칙칙한 빛깔은 우리네 머리털 같았다. 먼발치의 연분홍빛 꽃 무더기가 동글동글하게도 보였고, 분홍색이 아니라 희끗희끗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어릴 적 우리 몸에 생겨났던 버짐이나 도장밥을 닮았다. 내 얼굴이나 머리에 나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그때를 살았던 우리 대부분의 아픈 경험이었고 이름 모를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삼십여 년 전, 나는 전라남도 구례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두루 근무했다. 전라북도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했고 전주가 연고지여서 전라북도 내 공립학교에 취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교원 임용의 문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국립대학교 졸업생들은 도내에서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었지만, 일부 교과목과 사립대학교 출신들은 다 수용되지 못했다. 따라서 공립학교 임용을 위해서는 전국 각지로 흩어져 순위 고사를 치러야 했다. 나는 인접 지역인 전라남도에 응시했고, 구례군 교육지원청에 발령되었을 때는 경력 8, 9년이 되었을 때였다. 

  전주와 구례 사이는 주로 자가용 승용차로 이동하였다. 국산 자동차 생산이 원활해지면서 하나둘 개인용 차를 마련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장거리 출퇴근을 시도할 수 있었다. 나는 같은 학교 선생님들과 승용차 함께 타기를 하였다. 소요 시간은 대략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었다. 

  하루 두세 시간의 장거리 출퇴근은 고도의 긴장과 피로감을 동반하였다. 폭우가 퍼붓는 여름이나 산간 지방에 폭설이 쏟아지던 계절의 애환도 있었다. 그런 때 출근 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위험부담이 따랐음에도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위안 삼았다.

  승용차를 함께 이용해서 좋은 점도 있었다. 다소간의 경비를 줄일 수 있었고, 학교와 가정 외에 우리만의 또 다른 공간이 마련되었다. 자연스럽게 업무의 호불호나 웬만한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었다. 돌아보면 시시콜콜했던 점도 있었겠지만 많은 부분 든든한 의지가 되었다.

  우리가 달렸던 국도 17번과 19번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지리산과 섬진강을 끼고 있었다. 굽이굽이 산길이었고 어느 지점에선가 헌 옷을 누덕누덕 깁듯 날이 날마다 보수공사를 하여 교통의 흐름을 방해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계절마다 피고 지는 경치에 젖어 불편했던 것들은 빠르게 망각하기도 했다.     

  이 무렵 우리는 같은 학교 동료 네 사람이 함께 다녔다. 도장밥을 연상해 낸 선생님과 나는 1950년대 중반, 다른 두 선생님은 60년대 생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대의 끝자락에 태어났다고 할까? 전쟁 이전이나 전쟁 통보다는 훨씬 안정되고 좋은 시기라고는 할 수는 있겠다. 그래도 못 먹고 못 살던 시대, 그것은 우리의 어린 시절이었다. 반공 방첩 멸공 등 투철한 이념의 키워드들이 우리를 키웠고, 재건을 외치던 물결 속에서 우리는 힘겹게 자랐다. 

  DDT(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로 통용되는 살충제를 농작물은 물론 닭과 오리, 사람의 몸에까지 만능처럼 무분별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이 고난의 과정을 우리는 부모 형제들과 온몸으로 건너왔다. 팍팍하기만 했던 삶의 터전에서 악착같이 살아보려고 애썼던 그 끈기와 안간힘이 되돌아보면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전염병과 피부병이 도지던 그때가 희끄무레한 산벚꽃만 봐도 진저리가 났던 것이리라. 거기다 가정마다 제각기 다른 어려움이나 버거운 일상이 겹쳐 자라나던 우리들의 감성까지 앗아가 버리기도 했으리라.      

  보이는 것 저편을 떠올렸던 그 선생님에게 선뜻 대응할 아무런 답을 찾지 못했던 것은 그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산벚꽃이 곱게 피네요.”라고 말 한 선생님에게는 사실 이렇게 맞장구를 쳐 주고 싶었다.

“맞아요. 분홍 꽃들과 연둣빛 잎들 좀 보세요. 그 어우러진 경계의 모호함이 화선지에 물 번짐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경산수화 화폭 속에 우리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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