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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 Jul 16. 2021

움파 양념장

  봄비가 내린다. 비와 함께 흙 향기가 코끝에 전해온다. 이내 가슴 깊숙이 스민다. 시골에서 살았을 때는 그저 흔한 흙냄새였는데 살다 보니 좋은 향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주방 창 너머로 보슬거리는 봄비를 바라보다가 비에 묻어온 흙 향기를 따라 추억의 들로 나간다. 바구니도 없고 나물 캐는 도구도 잊은 채 아득한 곳으로 따라나선다. 딱 이맘때쯤 기억 속의 추억 하나가 발길을 이끈다. 움파로 만든 양념장의 맛과 향기, 그 어린 시절의 향수를 찾아 가본다.      

   양념장을 만들려면 깨끗이 다듬어진 움파를 송송 썬다. 몇 번 칼집을 더 넣어 성글게 다지듯 마련한다. 볶은 참깨를 얼핏 갈아서 깨소금을 만들어 놓는다. 자잘하기는 해도 육 쪽마늘도 다져 놓는다. 지난가을 고추장 담글 때 마련한 발 고운 고춧가루도 조금 준비한다. 잘 숙성된 조선간장 한 종지를 떠다 놓는다. 고소한 참기름을 챙긴다. 담을 그릇은 물기를 닦아 대기시켜 놓는다.

   옴팡한 중발에 다진 마늘을 깐다. 그 위에 잘게 썰어 놓은 움 파를 넉넉히 넣는다. 발이 고운 고춧가루를 조금 뿌린다. 간장을 변두리 즈음에 쫙 돌려 붓는다. 걸쭉한 정도를 가늠한다. 참기름을 살짝 두른다. 마무리로 깨소금을 소복이 얹는다. 

   어릴 때 내가 보고, 먹어 본 어머니의 움파 양념장 준비물과 레시피이다. 이런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인데 웬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내게는 회귀를 꿈꾸는 물고기의 귀향 DNA처럼 각인되어 있다. 고향의 물과 바람, 맛과 향기가 촌스러운 정서와 맞물려 미각의 원류를 이룬다.      

  막 만든 양념장은 재료 각각의 개별적인 맛과 향이 살아있었다. 그러면서도 짜고, 달고, 맵고, 향기롭고, 고소함이 서로 겉돌지 않는 통섭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경을 치거나 혀를 끌끌 찰 일일지도 모르겠다. 금기시하는 오신채 중의 대표적인 식물이 파와 마늘 등이라는데 그것들을 듬뿍 담아 양념장을 만들어 먹었다고 하니 못마땅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60년대 이른 봄 한 끼의 별식이었다. 지금처럼 영양가가 많거나 입맛을 돋워 줄 식품이 흔하지 않던 때에 감칠맛과 원기 회복까지 선사해주었다. 

  간장 그릇은 밥상 가운데 놓고 온 가족이 덜어다 먹었다. 어쩌다 마련한 귀한 맹 김에 밥을 싸 먹을 때 곁들여도 맛있었고, 콩나물밥이나 시래기 밥에 비벼 먹어도 그만이었다. 건더기를 한 숟갈 건져 맨밥에 끼얹어도 좋았다. 반쯤 바람 든 밍밍한 봄 뭇국에 살짝 뿌려도 어울리던 움파 양념장! 이런 것이 약식동원(藥食同源)의 한 근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유추해 보는 것은 기우일까?      

  겨우내 움츠렸던 우리는 봄기운이 서린다 싶으면 들로 나갔다. 바구니를 들고 손아귀에 꼭 쥐어지게 만든 조그만 칼을 챙겨서 갔다. 그야말로 “나물 캐러 바구니 옆에 끼고서 달래 냉이 씀바귀 모두 캐오자”(박태현 곡 김태오 작사, <봄맞이 가자>)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맘먹은 대로 나물을 많이 캘 수는 없었다. 이른 계절이기도 했고 아무나 나물을 잘 캐는 것도 아니었다. 이 밭 저 밭, 이 논둑 저 논둑, 이 언덕 저 물가를 누볐다. 여기저기 돌다 보면 바구니 속의 나물들이 지쳐 시들어버렸다. 그러면 그것들의 부피를 소생시켜 보려고 한 줌 들어 올렸다가 살살 내려뜨려 다시 담아도 보았다. 그래도 주저앉으면 시냇가로 갔다. 손에 물을 적셔서 나물 사이사이에 솔솔 뿌려도 보았다.

  움파는 작년에 거두어들인 고추밭에서 캘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부활한 대파의 다른 이름이다. 죽다 살아난 것이다. 

  예전에는 대파를 밭 전체에 심는 경우가 드물었다. 고추씨를 고랑에 직파하면서 대파 씨도 드문드문 고명처럼 뿌렸다. 가을 김장철 무렵에 수확했는데 날의 너비가 좁고 끝이 뾰족한 작은 곡괭이를 사용하였다. 고추 뿌리가 절어있는 틈바구니에 파가 끼어 있는 형국이어서 곡괭이가 제격이었다. 그랬음에도 대파의 줄기와 잎사귀만 뜯기고 뿌리가 땅속에 남겨진 경우가 생겼다. 이것이 시린 겨울을 뚫고 조금씩 자라 올라 움파가 되었다. 이 파는 발견한 사람이 임자였다. 누구네 밭이거나 나물처럼 캘 수 있었다. 역경을 딛고 살아남느라 채는 짧고 오동통하였다. 

  달롱개는 가늘고 길어서 부피감이 적었고, 나숭개는 있는 곳에만 있었다. 꽃다지는 포근포근한 식감에 비해 향이나 맛이 깊지 않아 그저 그랬고, 씬냉이는 쓴맛이 강해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면 잘 캐지 않는 나물이었다. 그렇다고 쑥은 좀 더 따뜻해져야 많이 나와서 바구니 채우기가 만만치 않았는데 움파는 예닐곱 뿌리만 있어도 왕건이를 건진 것처럼 풍성하고 오졌다. 


  사실, 어머니는 내가 친구들과 봄들로 나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나물을 깨끗한 곳에서 캤는지 알 수 없다 하였다. 티끌이며 누른 잎이 붙어 있는 것들을 가지고 오면 다듬고 정리하는 데 손이 너무 많이 간다고 하였다. 달롱개는 달롱개대로, 나숭개나 꽃다지는 그것들대로, 쑥은 쑥대로 모아서 담아왔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캐다가 놀다가 들고 온 것들이 성에 찰리가 없었을 것이다. 한 번은 나물바구니를 마당 가 두엄자리에 휙 던져버린 적도 있었다. 그 순간 조금 무섭기는 했으나 화가 나거나 야속하지는 않았다. 잔소리를 가장한 훈육이거나 충격 요법을 통한 자식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음이 통했을 수도 있다. 단지 어머니가 경계한 것은 “시냇가에 앉아서 다리도 쉬고 버들피리 만들어 불면서 가자 꾀꼬리도 산에서 노래하잔다.”(박태현 곡 김태오 작사, <봄맞이 가자>)에 있었을 것이다. 나물을 빙자하여 온갖 해찰은 다 했을 것이고, 재미난 놀이에 빠져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린것들이 밖에서 노는 것은 당연했고 거칠 것 없는 영혼이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살림에 겉도는 남편처럼 아이들까지 팽팽 놀기만 할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자식이라도 반듯하게 잘 기르고 싶은 애틋한 모정이었으리라. 또 단손 대기로 살아가는 형편에 부르면 달려와 잔심부름을 해 준다든지 하다못해 동생들이라도 돌봐주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런 마음을 헤아려 곁에서 늘 돕는다고 도왔지만 아이는 아이였을 뿐이었지 싶다.     

  오늘같이 봄비가 조용히 내리면 살뜰한 어머니가 있던 풍경과 움파 양념장이 떠올라 귀향하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아득한 고향 어느 즈음으로 자박자박 걸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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