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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 Jul 16. 2021

찢청 입은 의사를 보며

  몇 달 전부터 왼쪽 어깨에 통증이 생겼다. 괜찮아지겠지 하며 차일피일 병원행을 미루다가 나의 오랜 지기옥 선생이 다닌다는 P정형외과에 들렀다. 의사는 근육이 뭉쳤다면서 몹시 아픈 주사를 놓고 처방전을 써 주었다. 

  “이것은 소염제고요, 하얀색 타원형 약은 근육이완제입니다. 노란색 약은 위장약이고, 초록색 약은 소화제입니다.” 3일 동안 복용할 약을 건네주면서 검정 눈썹 선이 굵은 약사가 말했다.

  병원과 같은 건물에 있는 약국 문을 열고 나서는데 내 눈을 의심할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조금 전 P정형외과에서 만났던 의사가 길 위에 서 있었다. 진료실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키는 보기 좋게 컸고 얼굴빛은 희었다. 진한 먹색의 라운드 면 티셔츠에 비슷한 컬러의 데님 스타일 바지로 짝을 맞췄다. 더구나 먹색 데님 바지는 무릎 아래쯤이 가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일부러 생천을 절개한 후 해지게 만들어서 자연스러움을 가장하였다. 일탈한 씨실과 날실들이 투덜거리듯 너슬거렸다. 시쳇말로 ‘까도남’또는 탄탄함이 느껴지는 청년 한 사람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낡고 허름하기보다는 고급지고 준수한 차림이었다. 

  병원 안에서 보았던 그는 분명 늙수그레해 보였다. 연한 파란색 수술복 바지에 흰 가운 때문일 수도 있다. 후줄근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막대기에 끼워 놓은 것처럼 휘휘 겉도는 바지통이 조금 볼품없기는 했다. 흰색 가운도 훌렁훌렁한 느낌이었다. 얼굴은 갸름한 편이었는데 팔자 주름이 선명했다. 높게 올려 걸어 놓은 의사면허증을 보니 1959년생이었다. 

  그런 그가 보도 위에서 움직일 때마다 무릎과 정강이 부근의 벌어진 틈새로 하얀 속살이 얼비쳤다. 마치 “뭐 어때, 나 좀 봐줄래? 멋지지 않니?”라고 뻐기는 듯했다. 연갈색 샌들 사이로 드러난 뽀얀 발가락들이 시원하고 경쾌해 보였다. 한 손으로 을러멘 검은색 백팩 속에는 하루의 성취가 만족스럽게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대로 자전거에라도 올라타 어디론가 홀가분하게 떠날 것 같은 태세였다. 그러기 전에 만나기로 한 지인이 있었던지 그는 반대편 길에서 차도로 질러오려는 사람을 향해 외쳤다. “누가 무단횡단하라고 했어?” 목소리는 우렁찼다. 차림새와 장소가 사람을 저렇게까지 달리 보이게 하다니. 


  퇴직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만두면 뭐할 거냐?”라고 불쑥불쑥 물어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혼인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언제 혼인할 거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사람들은 나름 선의를 전제하고 노크해 오는 것이겠지만 나는 매번 곤혹스러웠다. 그럼에도 돌아서서 ‘그래 너 뭘 하고 싶니?’라고 자문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자유로워지는 거야, 너덜너덜하게 해진 청바지를 입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해 보는 건 어때?’라는 버킷리스트까지는 아니어도 묘한 통쾌함이 돋아나는 소망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요술램프에 갇혀있는 ‘지니’ 같았다. 마음속에 꼬깃꼬깃 구겨진 채 억눌려 있었지만 언젠가는 세상으로 나아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길 위에서 우연히 나의 페르소나를 본 것이다. 

  청바지, 그것은 유대계 독일인이었던 '리바이 슈트라우스(Levi Strauss, 1829~1902)'가 처음 제작하였다. 그는 185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주州에서 금광이 발견될 무렵 텐트나 천막에 사용되는 원단 제작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원의 실수로 원단 염색이 잘못되어 납품을 거절당했다. 대량의 원단을 몽땅 재고로 떠안게 된 그는 실의에 차서 술집에 들렀다. 그때 광부들이 여기저기서 해진 바지를 꿰매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문득 질긴 천막 천으로 바지를 제작하면 잘 닳지 않을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청바지는 무겁고 신축성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음에도 질기고 튼튼하다는 이점을 살려 남녀노소에게 사랑을 받으며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색상이 개발되었고 두께가 얇아졌으며 신축성까지 좋아졌다. 바지통은 넓어졌다, 나팔이 되었다, 스키니 스타일이 되기도 하였다. 갖가지 장식과 로고와 스티치로 개성을 드러낸 청바지는 취향을 넘어 유행이 되고, 트렌드를 지나 문화가 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질겨서 잘 해지지 않는다는 점이 식상해졌는지 찢거나 닳게 하는 정도가 거의 해체 수준에 이르렀다. 땅에 떨어진 벼 이삭 한 톨도 귀하게 여기던 기성세대가 보면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코 박은 격’이라 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이런 부류에 한 번 휘말려 보고 싶었다. 


  우리나라에 청바지가 들어온 것은 한국전쟁 중 주한미군을 통해서라지만 내가 자라나던 60년대 시골에서는 청바지를 쉽게 볼 수 없었다. 이 즈음 내 친구 청희는 할아버지 집에 살면서 나와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다. 막 철이 들기 시작하던 4학년 때 우리는 같은 반 친구가 되었다. 그 아이의 집은 읍내에 있었다. 우리 집과 고작해야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라 수준 차이가 난다고 해 봐야 도토리 키 재기였을 텐데 읍내와 변두리 촌 동네 아이의 자존심은 서로 달랐다. 청희는 마치 언니라도 된 양 같은 나이 친구들보다 자신이 우월한 듯 행동했다. 서울에 산다는 청희의 부모님이 보내준 입성은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넓게 맞주름이 잡힌 빨간색 모직 체크무늬 주름치마가 참 예뻤다. 등 뒤에서 X자로 교차되는 멜빵이 인상적이었다. 둥근 칼라에 레이스가 달린 하얀 블라우스가 눈부셨다. 무릎 밑에 살짝 도달한 긴 양말과 무릎 위까지 오는 스커트가 눈길을 끌었다. 리본이 달린 빨간 구두는 황홀할 지경이었다. 

  내 옷은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 준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특별히 불만을 품지는 않았지만 정강이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꽃무늬 포플린 치마가 자신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자투리 옷감이 남았던지 어머니가 살구색 융 소재로 멜빵바지를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이것을 입고 학교에 갔는데 아이들이 “깔깔깔” 웃어젖히며 “할머니 같은 느낌의 옷”이라고 떠들어댔다. 청희의 세련되고 화려한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알 수 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손수 지어 준 그야말로 사랑과 정성이 가득한 핸드메이드이었는데 그때는 부끄럽고 속상했다. 그것들은 얼마 가지 않아 무릎이나 엉덩이 부분이 낡고 해지기가 다반사였다. 그러면 그곳에 조각 천을 덧대어 꿰매 입으면서 이름 모를 상처를 나도 모르게 한 켜씩 쌓았던 것 같다.      

  내가 찢어진 청바지를 입어보려는 까닭은 어울리지도 않는 패션이나 흉내 내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두려워 안으로 감추고, 혹시라도 드러날까 무서워 잽싸게 덮었던 어린 날의 가난과 아픔을 새로이 성찰해 보고 싶은 것이다. 명분뿐인 염치를 챙기느라 자신을 굳건하게 세우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되돌아보고자 함이다. 더 이상 그런 일로 부끄럽거나 낭패스럽지 않아도 된다고 다 늦게나마 자신을 위로해 주고 싶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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