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사가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죠?”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 너무도 일상적인 물음이었는데 꿈속에서 허방다리를 짚었을 때처럼 아찔했다. 긴장감이 한순간에 정수리 부분으로 쏠렸다.
“그래, 오늘이 며칠이지?” 자문해 보았다. 9월은 분명했다. 그런데 날짜는 짙은 해무에 갇힌 거 같았다. 언제부턴가 한 번씩 “내 나이가 몇이지?”라고 놀란 적이 있었던 기억까지 겹쳐서 ‘이거 심각한 증상인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해진 직장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다투는 일도 없는 생활이 쌓이다 보니 그날이 그날인 삶, 굳이 나이 같은 걸 기억하지 않아도 별 지장 없이 흘러가 주는 일상.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무사안일이 싹텄을까. 그깟 숫자 몇 개 기억하지 않아도 뭐 그럭저럭 나날들.
하지만 예상을 깨고 그깟 숫자가 당면한 문제로 맞닥트려져 즉시 대답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다. 나는 상담사의 눈빛에 초점을 맞추며 몇 가지를 빠르게 유추하였다. 그리고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메일을 열었다. 〈행복한 경영 이야기〉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라는 문구를 읽었다. 분명 오늘인 건 맞지만 며칠과는 멀 었다. 또 다른 메일 〈한경 詩 읽는 CEO〉에서 고두현 시인이 띄우는 시 한 편을 음미했다. 허영자의 〈완행열차〉였다. 이 소식은 매주 금요일에 배달된다. 그렇다. 오늘은 금요일이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었다. 내친김에 시 한 편을 되뇌어 본다.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허영자, <완행열차>)
인생의 급행열차를 놓쳐버린 시점에서 완행열차까지 놓칠까 싶은 조바심이 밀려왔다. 오늘이 며칠인 건 계속 오리무중이었다. 이번에는 집을 나오기 전에 훑었던 인터넷 뉴스를 따라가 보았다. “김웅 압수수색에 野 격앙…‘고발 사주’ 정국 파장 확산” 등이 있었다. 또 KBS 뉴스에서 방영한 9.11 테러 영상들이 스쳤다. 사건은 20년이 지났어도 미결 상태이며 아직도 1,000여 명의 신원 파악을 하지 못했다는 내용에 시선이 머물렀었다.
그렇다면 오늘이 9월 11일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뉴스는 당일뿐 아니라 전후로도 할 수 있잖아?’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무언가 빨리 답해야 할 것 같은 성급함이 불쑥 뛰쳐나갔다. “11일인가요?” 상담사의 표정이 살짝 변하려다 질문을 바꿨다. “그럼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금요일요.” 나는 얼른 대답했다. “이제 다시 날짜를 떠올려 보세요.” “13일인가?” 느닷없이 어떤 세포 하나가 딱하다는 듯 속삭였다. 그때 또 다른 세포가 외쳤다. “아니야, 13일은 월요일이야. 치과 예약 메시지가 왔었잖아?” “월요일이 13일이면?” 상담사가 추산해 보라는 듯 살짝 시선을 돌렸다. 다급해진 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거꾸로 헤아렸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손가락 끝에서 떨고 있었다. 입 밖으로 13, 12, 11, 10을 소리 냈고 속으로는 월, 일, 토, 금을 대입하면서. 그런 후야 비로소 확신에 차서 말했다. “아, 오늘은 9월 10일입니다.”
언젠가 보건소로부터 치매 예방을 위한 홍보 우편물이 날아왔었다. 마치 독촉장을 받는 기분이었고 선뜻 가고 싶지 않았다. 무료 검사라 하니 왠지 성의 없을 것 같은 선입견이 있었음도 부인하지 않겠다. 물론 관에서 시행하는 일이 신통치 않을 거라는 막연한 불신감도 있었다. 또 이런 곳에 가면 “어르신, 어르신”이라고 호칭하는 게 입에 발린 말 같고 아직은 거북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고령 사회에 치매 문제가 이슈로 등장한 지 오래고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압박감이 동요했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 사태가 되기 전에 큰 맘을 먹었다. 무료라고 하지만 공짜로 취하려고 한 게 아니고 내가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정책인데 마냥 버틸 일도 아니었다.
초가을 햇빛이 따갑게 퍼지기 시작하는 9월 10일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보건소 안에 마련된 치매 안심센터를 방문하였다. 검사장은 조그만 방이 세 개 있었다. 중앙 공동사무실과 좌우로 개별 검사실이 있었고 두 명의 젊은 상담사가 대기 중이었다. 신원에 대한 간단한 질의 중에 학력 사항을 묻는 게 특이했다. 인지기능 파악에 개인차를 고려하는가 싶었다. 나를 담당한 상담사는 긴 머리를 뒤로 느슨하게 묶었고 체격이 큰 여성이었다. 사무적이거나 전문성 있는 태도 중간쯤에서 질의했고 응대하였다.
훅 들어왔던 날짜 맞추기 고비를 넘긴 후에 다른 검사를 시작하였다. 질문자가 숫자를 4개씩 먼저 말하고 따라 하는 검사였다. 그게 끝나자 숫자와 계절을 교대로 대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1, 봄, 2, 여름, 3, 가을….”
그다음엔 몇 개의 도형을 제시하고 그려 보라 했다. 다음은 도형을 차례로 나열하는 거였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또 동그라미, 세모, 네모 이런 식이었다.
도형이 끝난 후에는 문장 따라 하기였다. “민수는/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에 가서/ 11시에/ 야구를 했다.” 어절의 순서를 기억하는 게 긴장되었지만, 평소 문장 연습을 했던 게 도움이 되었나? 혼자 속없이 우쭐해지기도 했다. 제시한 단어를 거꾸로 말하기도 있었다. 예를 들어 금수강산을 산, 강, 수, 금으로 뒤집는 거였다.
끝으로 좋아하거나 아는 과일과 채소 이름을 대는 거였다. “복숭아, 포도, 사과, 배, 감, 살구, 자두, 키위…” “배추, 무, 상치, 쑥갓, 열무, 시금치, 파, 마늘…” 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필두로 상담사가 “고만”이라고 할 때까지 주워섬겼다.
검사는 그야말로 기초적인 인지기능 테스트였다. 오늘 날짜를 물었을 때 단박에 떠올리지 못했던 것 말고는 거칠 게 없었다. 하지만 날짜를 묻는 데 선뜻 답하지 못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결국, 치매란 누가 “오늘이 며칠이죠?”라고 물었을 때 영영 기억해 내지 못하는 황망함이었다. 지적 수준이나 내가 누구라는 우쭐함은 물론 사소한 것, 일상적인 것, 당연한 걸 까맣게 잊어가는 일이었다. 마치 초록색 잎사귀에서 색소가 빠져나가 단풍이 되었다가 낙엽이 되는 거처럼….
어떤 경우 인간의 뇌 속에서 기억의 색소가 날아가 버린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러기 전에 사소한 것일지라도 일부러 지우거나 무심해서는 안 되겠다는 절실함을 느꼈다. 살아 있는 한 삶을 위한 절차탁마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다.
검사가 끝나자 상담사는 결과지에 파란 색연필로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정상이라고. 그 아래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부연하였다.
인지기능이 정상 수준입니다. 건강한 인지기능을 유지하실 수 있도록 평소에 치매 예방수칙 준수와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 만성질환 관리를 잘하시고, 정기적으로 치매 조기 검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