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물었다. “소크라테스의 종교가 뭔지 알아?” 생뚱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여자가 응했다. “잘 모르겠는데?” “이슬람교야.” “엉? 왜 이슬람교야?” “말끝마다 ‘~알라, ~알라’라고 했잖아.” “그러네.” “그렇지? 너 자신을 알라!”
삼척동자도 알 만한 성인이요 대철학자를 감히 난센스적인 대화법으로 소환하다니 용감무쌍하다. 최근 한 발 더 나간 발상으로 뭇사람들에게 화제가 된 이가 나타났다. 〈테스 형〉을 노래한 가황 나훈아다.
9월 30일 오후였다. KBS2에서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라는 콘서트를 실시간 방영하였다. 2020 한가위 대기획으로 기약 없는 코로나 19에 지친 국민을 위로하고 다시 한번 힘을 내도록 응원하자는 취지였다. 기획 의도는 적중하였다. 1천여 명의 비대면 방청객이 화상으로 참여했는가 하면 공연 후에는 온 나라가 나훈아 열풍에 휩싸였다.
15년 만에 방송 출연을 한 가수는 밤새워 노래할 수 있다며 “할 것은 천지 삐까리”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지금 별의별 꼴을 다 보고 사는 중입니다. 서로 눈도 좀 쳐다보고, 손도 좀 잡아 보고 싶은데 아쉽습니다.”라고 했다.
화면 속에서 일흔네 살 흰머리 청년의 심장이 벌떡였다. 대충 빗어 넘긴 듯 세어 버린 곱슬머리와 거칠거칠하게 자라난 턱수염이 인상적이었다. 툭 꺼진 눈두덩과 불거진 광대뼈 사이로 이글거리는 눈빛이 한 마리 성난 호랑이를 연상케 하였다. 독보적인 가창력과 환상적인 무대 장치는 2시간 30분 동안 눈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공연은 3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부는 고향, 2부는 사랑, 3부엔 인생을 주제로 하였다. 〈고향으로 가는 배〉, 〈고향 역〉, 〈고향의 봄〉, 〈모란 동백〉, 〈물레방아 도는데〉, 〈홍시〉, 〈아담과 이브처럼〉, 〈사랑〉, 〈무시로〉, 〈울긴 왜 울어〉, 〈사모〉, 〈18세 순이〉, 〈갈무리〉, 〈비나리〉, 〈영영〉, 〈공〉, 〈청춘을 돌려다오〉, 〈남자의 인생〉, 〈번지 없는 주막〉, 〈고장 난 벽시계〉, 〈사내〉 등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곡들이 이어졌다. 그에 더해 새로운 곡 〈내게 애인이 생겼어요〉, 〈테스 형!〉 등 총 29곡을 부르며 나훈아는 무대를 장악했다.
3부 두 번째 곡이 시작될 때였다. 화면 오른쪽 아래 노래 제목과 작곡가, 작사가, 무용단과 합창단을 소개하는 자막이 떴다. 그리고 시작된 곡은 나훈아의 자작곡으로 제목이 <테스 형!>이었다. 전주가 나가는 동안 나의 머릿속은 암전 되었다. 학창 시절 시험 볼 때 전혀 예상하지 않은 문제가 나왔을 때처럼 깜깜해졌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불현듯 도졌다. ‘테스? 토머스 하디의 장편소설 그 《테스》인가? 그런데 형은 또 뭐야? 말이 안 되잖아?’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흔드는데 가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테스 형, 테스 형을 외치다가 어느 순간 “소크라테스 형”이라고 하였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 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 형 소크라테스 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 형//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 들국화도 수줍어 샛노랗게 웃는다/ 그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아! 테스 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아! 테스 형 소크라테스 형 세월은 또 왜 저래/ 먼저 가 본 저세상 어떤가요 테스 형/ 가 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아! 테스 형 (〈테스 형!〉, 나훈아 작사, 작곡)
이 노래는 아버지 산소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고 전한다. 테스 형은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트로트 장르의 특성상 곡의 분위기가 무겁지 않게 하려고 소크라테스를 대입했다. 그는 “테스 형에게 ‘세상이 왜 이래? 세월은 또 왜 저래?’라고 물어봤더니 모른다고 했습니다. 세월은 누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가게 되어 있으니까 이왕에 세월이 가는 거 (…)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고 안 가 본 데도 한번 가 보고, 안 하던 일을 해 봐야 세월이 늦게 갑니다. 지금부터 나는 세월의 모가지를 비틀어서 끌고 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해도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모른다.”였을 것 같다. “산파가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 그저 도울뿐이다. 그러니 세상이 왜 이러냐고 나에게 절규해 본들 답을 찾는 건 너의 몫이다.”라고 직설적으로 답할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이 “훈아 오빠! 훈아 오빠!”라고 열광할 때 나는 뒷전에 있었다. 순전히 사사로운 편견이었지만, 강렬한 인상과 넘치는 열정 같은 것들이 보기에 좀 버거웠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고 떠들썩할 때도 연예인들의 그런저런 사연이겠거니 금줄을 그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을 보고 나니 그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세상을 보는 내 시야가 넓어졌거나 수용의 폭이 너그러워졌을 수도 있다. 아니면 〈테스 형!〉에게 반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풀어놓고 보니 그의 감각은 더욱 출중하게 다가왔다. 그는 바다 입수나 와이어 액션도 서슴지 않았다. 민소매 셔츠에 심하게 찢어진 청바지, 기타와 북 연주 등 능수능란한 퍼포먼스가 자유 그 자체였다.
변화무쌍한 공연 진행도 돋보였다. 배와 기차를 무대 위에 올렸는가 하면 살짝 아슬아슬하고 남세스러운 점도 있었는데 연주 의상을 무대 위에서 바꿔 입는 연출이었다. 무엇을 염두에 두었을까 궁금했는데 시청자들의 심리를 꿰뚫은 고도 전략이었다고 한다. 지루함을 느낄 틈 없이 채널을 고정하게 하는 장치였다니 그 세심함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노래는 트로트를 비롯해 힙합과 헤비메탈, 국악과 클래식 등을 아우르며 장르마저 자유자재로 뛰어넘었다. 물론 그의 음악이 모든 이의 심금을 울리거나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람들이 그를 가황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에는 오늘 연주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끝없이 도전하고 변화하는 예인임을 알았다. 무엇보다 자기 몫의 인생을 꿋꿋이 살아 내며 대중과 소통하고 감동을 나누고자 열망하는 이 시대의 휴머니스트임을 느꼈다.
그는 코로나 19 방역에 애쓰는 의료진과 우리 국민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였다. “옛날 역사책을 보든 제가 살아오는 동안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나라를 누가 지켰냐 하면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지켰어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이 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1등 국민입니다.”라고 힘을 북돋웠다.
공연 도중 김동건 아나운서가 짧게 인터뷰하였다. ‘언제까지 노래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내려올 자리나 시간을 찾고 있다.’라며 ‘이제는 내려올 시간이라 생각하고, 그게 길지는 않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앞으로 어떤 가수로 남고 싶은가라는 물음에는 “흐를 유(流), 행할 행(行), 노래 가(歌) 유행가 가수입니다. 〈잡초〉를 부른 가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부른 가수, 흘러가는 가수입니다. 무엇으로 남는다는 말 자체가 웃기는 얘기입니다. 어떤 가수로 남고 싶으냐 그런 거 묻지 마소!”라고 하였다.
〈테스 형!〉을 들은 누군가는 인터넷 위키 백과사전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나훈아가 소크라테스의 의형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