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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 Jul 16. 2021

떠돌이별처럼


  그 애 이름은 점봉이었다. 필시 몸속 어딘가에 봉긋한 점이 돋아 있겠지? 이름을 듣는 순간 짓궂은 상상이 일었다. 마을 사람들은 “점벵아.” 또는 “점뵝아.”라고 불렀다. 소통이 잘 안 될 때는 내 외할아버지 이름을 끼워 “아 왜 그 이수 씨네 꼬마 뎅이.”라고 콕 집어 말했다. 내가 예닐곱 살이었을 적에 그 애는 열한두 살쯤의 소년이었다. 어디서 흘러왔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부턴가 그냥 우리와 함께 있었다. 임헌영의 수필 〈금빛 게으른 울음〉을 읽다가 문득 소 치던 아이 점봉이가 떠올랐다. 달을 보아야 하는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격이었다. 

     

  나의 외가에는 한두 명의 장정 일꾼이 있었다. 상머슴 격인 나이 지긋하고 듬직한 이와 보통 일꾼인 다른 한 명이 있었다. 그 밖에 소소한 노동력을 제공하던 군식구 서넛이 상주하다시피 했다. 덕분에 아주 바쁜 농번기가 아니고는 일손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을에는 가끔 궤도를 이탈한 떠돌이별 같은 객식구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런 이가 나타나면 묵언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몇몇 집으로 보냈고 내 외가도 그중 하나였다. 그렇게 등장한 아이가 점봉이었다.

  머무는 동안 제 밥벌이라도 떳떳이 하라는 의미로 상머슴 일꾼은 점봉이에게 일감을 몫 지어 주었다. 그 아이의 일은 주로 소를 돌보는 것이었다.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소를 들판에 내다 매어 놓거나 풀을 뜯긴 후 저녁때 몰고 들어오는 일이었다. 

  소가 들판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을 때면 점봉이는 자유였다. 일단 소와 연결된 밧줄을 느슨하게 풀어 쇠말뚝을 튼튼히 박았다. 그런 후에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다가 장소를 두어 번 옮겨 주면 되었다. 들판에서는 동서남북에서 날아오는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었고 하고 싶은 해찰도 나름 할 수가 있었다. 

  새벽이나 석양 무렵엔 쇠죽을 쑤었다. 쇠죽 가마에 여물을 잔뜩 집어넣고 모아 놓았던 허드렛물을 부었다. 장작이나 잘 마른 솔가지, 때론 마른 콩대나 들깨 대를 태웠다. 다 끓이면 외양간의 구유에 날라다 주었다. 어른들이 주위에서 도와주었지만, 천방지축 어린애에게는 재미없고 심심한 일이었다. 

  그 아이는 저녁 무렵 쇠죽을 끓일 때면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톡톡 두드리며 유행가 한 곡조를 맛깔나게 뽑았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애수의 소야곡〉, 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목소리는 제 눈빛보다 맑고 구슬펐다. 고샅을 휘저으며 아이들과 놀 때와는 달랐다. 열한 살 나이에 인생의 고단함을 알아 버렸을까?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던 그 애의 감성이 고개 끄덕여지는 상황을 최근에 접했다. TV 경연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 트롯 2〉에서였다. 청학동 소녀 김다현의 〈회룡포〉나 아홉 살 어린이 김태연이 부른 〈바람길〉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이다. 세상에 거리낌 없이 자랐을 소녀들도 저토록 애끓게 절규하는데 혈혈단신 점봉이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계절이 바뀌면 노래도 달라졌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짝사랑〉,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     

  〈금빛 게으른 울음〉을 보다가 곁길로 빠진 것은 작품 속의 소와 관련한 다채로운 일화가 어린 시절의 풍경을 돌아보게 하였기 때문이다. 농촌에 심신을 비비대고 살던 내 눈에는 소에 대한 생동감 넘치는 묘사가 유독 실감 났다. 한편으로 소들의 농밀한 생리 현상에 관한 서술과 전통 소에 대한 애정 어린 정보를 접하면서는 ‘늘 소를 바라보며 살았는데 소는 건성으로 대하고 점봉이의 부지깽이에만 집중했구나.’ 자성도 되었다.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소를 먹이는 일은 청소년들도 거들어야 했다. 집에서 쇠죽을 끓여 주기도 했지만, 풀들이 무성한 때에는 집 밖으로 몰고 나갔다. 〈금빛 게으른 울음〉을 보면 작가의 고향에서도 ‘어정칠월 동동팔월’ 무렵 저녁나절에 그렇게 했다 하니, 소 한 마리에 학동 한 명씩 긴 행렬이 이어져 좁은 시골길이 그득 했겠다. 해가 설핏 기운 하늘은 아직 푸르렀을 것이고 들판은 초록으로 무성했을 테지. 소들의 건강한 황톳빛이 들판과 대비를 이루는 싱그러운 원색의 고향이 그려졌다.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시간에 학동들은 다양한 놀이를 즐겼다. 입술이 가짓빛으로 질리도록 물놀이를 했고, 개울가 바위틈에 사는 집게발 달린 가재를 잡기도 하였다. 정자나무 아래서 낮잠을 즐길 수도 있었다. 〈금빛 게으른 울음〉에서 고등학생 정도의 청소년은 그늘에서 책을 읽기도 했다. 아마 그 독서하던 청소년이 작가가 아닐까 짐작해 보기도 했다. 

  우리 마을 소 치던 아이 중에는 학동이 아닌 아이도 있었다. 사는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했거나 어쩌다가 이 마을에 머물게 된 점봉이 같은 경우였다. 그 애는 검은자위가 넓은 큰 눈에 긴 속눈썹을 가졌다. 눈을 껌뻑이는 모습이 송아지와 닮아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지만, 샐쭉 웃을 때는 개구쟁이 어린애 그 자체였다. 얼굴형은 길고 둥그스름하였다. 짧게 깎았던 머리카락이 자라나면 성게 가시처럼 쭈뼛거렸고 목 뒤 중앙에 쏙 빠져나온 제비초리가 있었다. 또래보다 왜소했지만, 몸은 날랬다. 골목에 나가 아이들과 얼크러질 때는 작은 몸피와 다르게 다부졌다. 노는 재미에 빠져 어떤 날에는 들판에서 소를 데려오는 걸 까맣게 잊기도 했다. 결국 밤중에 어른 일꾼들과 등불을 밝혀 들고 가서 찾아왔다. 

  그 아이는 소를 돌보지 않을 때면 잔심부름을 했다. 앞마당 우물에서 부엌까지 물을 길어 나르거나 헛간에서 땔감을 옮겨 오기도 하였다. 함석 양동이 가득 물을 담아 갈 때는 질금질금 엎지르기가 다반사였다. 나뭇단을 안고 오면은 거의 끌다시피 해서 황토로 다져놓은 마당에 삐뚤빼뚤 선들이 그어졌다. 

점봉이의 검정 고무신은 소 꽁무니를 따라다니랴, 어른들 심부름에 달리랴, 부산스러운 주인을 싣고 다니느라 시도 때도 없이 숨이 가빴다. 언젠가는 골목에서 놀다가 한 짝을 날려 버리기까지 하였다. 잃어버린 신발을 찾느라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어른들은 골목길을 향하여 “점뵝아~이.”라고 성화를 냈다. 지청구라도 들을라치면 울 것 같았는데 절대로 울지는 않았다. 오히려 “히히” 웃으며 능청스럽게 에둘러 갔다.

  그 애의 거처는 사랑방 귀퉁이였다. 사랑방이라고 해서 책가도가 드리워지고 서안 위에 문방사우가 가지런히 정리된 선비들의 장소는 아니었다. 그냥 사내들의 공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일꾼들의 방이었다. 일꾼들과 동네 남정네들이 일하다 놀다 잠도 자는 곳이었다. 그 틈바구니에 점봉이가 있었다. 드러누우면 등이 따뜻했다는 것 말고는 아동에게 쾌적한 공간은 아니었다.

  횃대에는 시큼한 땀 냄새가 나는 옷들이 걸쳐 있고, 방 안에는 꼬리 한 발 냄새며 아궁이에서 올라온 매캐한 내도 스며 있었다. 한쪽 벽 쪽에는 가마니틀이 놓였다. 구석 쪽 벽에는 짚신 삼을 때 쓰는 형틀이 망태기에 담겨 걸려 있었다. 농한기가 오면 그곳에서 새끼를 꼬거나 멍석과 멱서리를 짰다. 

  글줄이나 읽은 동네 한량은 낭랑한 소리로 《춘향전》을 노동요 삼아 읽어 주었고, 《삼국지》도 들려줬다. 점봉이에게는 까막눈이라도 피하라고 백열전등을 가까이 당겨 한글과 셈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 애는 헐레벌떡 뛰어다니며 노는 것과 유행가를 멋들어지게 부르는 것 외의 일에는 관심이 도통 없었다. 물론 속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는 부는 바람 따라 훨훨 떠나갈 것 같은 기색의 아웃사이더였다.

  겨울이 오면 동네 아이들의 손등은 더덕 껍질처럼 거칠어졌다. 거칠다 못해 갈라지고 터졌다. 점봉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가끔 쇠죽을 퍼주고 남은 물에 두 손을 담가 불렸다. 때가 불기를 기다리며 또 트로트 한 곡을 읊었다. “미아리 눈물 고개 임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앞 보고 헤매일 때….”(〈단장의 미아리 고개〉,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쇠죽 물은 뜨끈하고 검푸르죽죽했다. 쇠죽 가마 아궁이 앞은 잉걸불이 남아 따뜻했다. 짚방석을 깔고 앉아 불린 때를 밀었다. 자그마한 돌멩이를 주워다가 도구로 삼았다. 손을 씻은 후에는 어디서 났는지 덩어리 진 쇠기름을 보습제 삼아 바르기도 했다. 

  해가 두 번쯤 바뀐 어느 날, 열한두 살의 삶을 온몸으로 부대끼던 점봉이를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왔던 곳이 묘연했듯 떠나갈 때도 그러했다. 애절했던 노랫소리도 더는 들을 수 없었다. 그 애가 벗어놓고 간 뒤축 닳은 검정 고무신과 소 울음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떠돌이별이 되어 흐르는 동안 그 앨 잊었다. 임헌영의 수필 〈금빛 게으른 울음〉 속 ‘소 먹이기’ 삽화를 통해 봄날 깜빡 백일몽에 빠진 듯 점봉이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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