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30년 이상 회사를 다닌 임원이라 할지라도.
가끔 모회사의 인사담당이 전화를 줄 때가 있다. 그들 입장에서는 항상 가벼운 확인전화라고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질문에 정확히 답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를 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그 질문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바로 답변하기 힘든 경우가 꽤 있다. 특히 내 자리가 아닌, 출장을 가 있을 때라던지 그런 경우. 업무를 하고 있다면 그 업무의 연속성 때문에 생각이 바로 쉽게 나거나 찾아보거나 할 수 있는데 아예 외부에 있다면 순간적으로 질문을 받고 뇌정지가 찾아온다. 그렇지만 모른다고 하기가 좀 힘들다.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모른다고 했을 때 상대방에게 기억되는 내 무능(?)한 이미지가 너무 싫다. 그래도 부정확한 정보를 줄 수 없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확인 후 연락준다고 살짝 시간을 벌어본다. 그리고 전화를 끊은 후 부리나케 팀원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한다. 그리고 전화가 아닌 메신저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그 질문의 그물에서 겨우 벗어난다.
나만 느끼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옆자리 과장님도 느끼고 있는 업무의 어려움 중 하나였다. '그들은 준비하고 전화하니까, 받는 사람이 항상 을이 될 수 밖에 없다.' 사실, 자회사와 모회사의 관계에서 모회사의 연락은 항상 껄끄러울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 확인 전화의 내 답변때문에 의사결정이 바뀐다면 더더욱 그 때의 창피함을 벗어나려고 대충 대답한 나의 책임이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그 전화 한통의 무게감이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무게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같은 일반 직원만이 아니라 임원도 마찬가지라는 걸 처음 알았다. 대표이사님이 그랬다.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대표이사님도 모회사의 여러 의사결정자들과의 통화가 버겁다고 하였다. 정확히는 '먼저 걸려온' 통화다. 내가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그들에게 걸려온 통화를 아무 생각없이 받았을 때, 질문에 답변 못하고 어버버하는 그 말투와 겉도는 내용들을 그 분도 참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표님은 어떻게 대처하나요?' 대답은 간단했다. '끊고 다시 건다.'
발신자를 보면 이 사람이 왜 이 타이밍에 전화를 거는지 아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는 어느정도 나도 업무의 연속성 때문에 머릿속에 정보들이 앞쪽으로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라 바로 받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왜 이 분이 이 시간에 전화를 하지?'하는 경우는 십중팔구 내가 예상 못하는 내용일 경우가 크기 때문에, 일단 전화는 받고 '회의 중이라 나중에 전화한다.'는 피드백으로 잠시 시간을 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직위와 직무 등으로 유추해 어떤 내용일 지 미리 예상하고 다시 건다고 하셨다.
간단했다. 그리고 대표님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내 마음을 조금 안정되게 만들었다. 사실, 내가 실력이 없어서 항상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오래 회사생활하고 임원까지 되신 분도 똑같은 고민과 그에 따른 대응책도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 분과 나의 업무 노하우와 깊이는 천지차이겠지만 어쨌든 100% 실력이 부족해서 힘들었다는 생각은 조금은 접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하는 업무에 있어서는 머릿속에 간단하게 숫자라도 외우고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들면, 1년 평균 인건비와 그 중에 OT 비율은 어떻게 되는지 등. 작년 평균 연봉 인상률은 어떻게 되고 인센티브 지급율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 말이다.
이런 매뉴얼화 되지 않은 업무 노하우들이 쌓여 남들과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그때 그때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번 기회에 최대한 내 업무 만큼은 머릿속에 어느정도 정리해서 바로 대답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늘리고 정 안되면 대표님과 같은 방법으로 시간을 벌어야지 하는 생각들이 나중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당연히 나는 후자의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