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잘 지내세요.
드디어 퇴사를 했다. 나는 그동안 K부장에게 남자 친구 롤이었고 퇴사를 선포하던 시점에 나는 소히 말하는 쓰레기 똥차 구남친이 됐다.
퇴사를 앞두고 친했던 실장님, A부장님과 아쉬운 마음에 끈끈하게 우정을 다졌다. 같이 회사 주변 떡볶이 탐험을 나선다거나 노포 맛집을 찾아낸다거나 마치 밀린 숙제라도 하는 양 친목을 다지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는데 그게 또 화근이었다. 내 사적인 이야기의 수신자가 다른 상사들이고 본인은 참조에 넣어두었다는 게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렇게 난 K부장을 두고 다른 이성들과 희희낙락 거리며 바람피운 남자 친구가 돼있었다.
K부장에게 '나'라는 사람은 본인과 가장 친하고 본인에게 가장 의지하고 있는 '내 사람'이었기에 내가 주말에 뭘 했는지, 요새 연애사는 어떤지 본인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하고 본인에게만 이야기해야 하는 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게 그렇게 섭섭했다는 거다. 퇴사를 선언하는 나에게 그런 말들을 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퍽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못 했다. 열몇 살 어린 내 앞에서 저렇게 서럽게 울 일이 맞는지, 난 왜 이 사람한테 그렇게 까지 큰 존재였던 건지 모든 게 의문 투성이며 여간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사이코 같은 모습들로 정말 온갖 정은 다 떨어졌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생각했을 땐 참 안쓰러운 사람이다. 집이나 친구나 남자 친구나 어디 하나 의지할 곳도 없고 나이는 먹어가고 능력은 없고 빚은 많고... 그러니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녀 세상의 전부인 거다. 그러니 조그마한 일에도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며 대단한 실수라도 한 마냥 오버를 해대고, 말 잘 듣는 나이 어린 대리는 맛집도 같이 다니고 회사 욕도 마음대로 하는 남자 친구 같은 존재였던 거다.
그녀는 내 이별 선포에 눈물로 응답했지만 그 뒤로 서서히 불편을 드러냈다. 마치 이제는 내가 그녀의 타겟이 된 듯이. 마지막 날에는 인사 몇 마디 나눴던 분들까지 나와 배웅해주셨지만 K부장은 시간이 되면 알아서 가라며 굳이 팀원들을 전부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지만 한편으론 드디어 수준 낮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기뻤다. 퇴사를 앞둔 즈음에는 차라리 나도 여느 힘들다는 직장인들처럼 야근에 지치고 일 때문에 혼나는 직장생활을 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퇴사하고 몇 개월 뒤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K부장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때, 친했던 대리님으로부터 연락 한통을 받았다.
“대리님, K부장이 제가 A부장님이랑 친하게 지내서 눈엣가시래요.”
그녀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누군갈 열심히 미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