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준비

꽤 대단한 서른이 되고 싶어서요.

by 고룩한밤

이전에 브런치에서 봤던 글 중 유독 기억에 남는 글이 있다. 기타를 배울까 말까 고민하는 저자에게 지인이 했던 말이다.


"야, 네가 기타를 쳐도 시간은 가고, 기타를 치지 않아도 시간은 가"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누구에게나 당연하지 않은 말이 아닌가 싶다. 그냥 하면 되는데 잡생각이 너무 많은 게 문제다. 그냥, 그냥 하면 된다. 꽤 대단한 서른이 되고 싶어 이걸 해야 할까 저걸 해야 할까 재고 따지던 와중에 이것 저것 재느라, 따지느라 막상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어차피 시간은 가니까, 어차피 서른은 되니까 그 시간을 그냥 밀도 있게 써보려고 한다. 그럼 꽤나 멋있는 서른살이 돼 있지 않을까.



혼자 재밌을까?

퇴사를 앞두고 A부장님이 공백기 3주 동안 뭐하면서 지낼 거냐고 물으셨다. 다음 달에 준비하던 자격증 시험 때문에 공부하면서 지내야 할 것 같다고 하니 부장님이 또 내 눈을 번뜩이게 만드신다.


“야,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냐. 또 출근하면 쉽게 오지 않을 시간인데 공부만 하는 건 억울하잖아. 공부하더라도 좋은 데서 좋은 거 보면서 해.”


그러면서 혼자 여행을 추천하셨다. 속초, 춘천, 동인천, 강화도, 제주. 요즘 혼여행으로 핫하다는 지역부터 예쁜 책방이 있는 곳들 등등 각 지역마다 어떤 코스로 가야 하는지 집어주시며 자꾸 나를 유혹하셨다.


“여행을 제가 혼자 갈 수 있을까요..? 전 영화도 혼자 본 적 없고 좋은 걸 보고 먹고 들을 때 사람들과 공감하면서 나누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서요.“라며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내 마음 한편에는 이미 첫 혼자 여행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A부장님은 우선 가볍게 동인천을 당일치기로 다녀와보고 좋으면 속초 일박, 그것도 좋으면 길게 제주도를 다녀오라고 레벨별로도 코스를 짜주셨다.(이래서 내가 A부장님을 참 좋아한다. 매번 우물 밖 세상을 알려주시는 분)


그렇게 A부장님의 혼자 여행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들까지 다 들은 그날 저녁, 나는 바로 바닷가 앞 속초 호텔을 예약하고 버스까지 예매한 후 짐을 쌌다.


‘내가 혼자 여행이라니…‘ 터미널에 가는 길에도, 버스에 타 안전벨트를 매면서도 믿기지가 않았고 한편으론 내가 너무 기특했다. 혼자선 식당가기도 싫어하는 타입인데 언제 이렇게 컸나, 뭔가 대단히 성장한 느낌이었다.


[청초수물회] 로봇이 서빙해준 물회를 정갈하게 세팅하고 찍은 설정샷

도착하자마자 A부장님 추천대로 물회를 먹으러 갔다. 가족단위, 친구 단위가 대다수라 ‘역시 혼자는 무리였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였다. 아무도 혼자 온 나에게 관심 두지 않았고 혼자 먹은 물회는 너무 맛있었고 누군가의 먹는 속도를 따라갈 필요도, 혹시 음식이 상대방 입맛에 안 맞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전부 필요 없었다. 내 안부뿐이 중요한 게 없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여행이었다.



책은 일 년에 읽을까 말까였는데

두둑이 배를 채우고 청초호를 따라 쭉 걸으며 쨍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조금은 차가운 공기에 눈이 살짝 찡그려질 정도로 따뜻한 햇살에 나른한 기분까지, 이런 게 진짜 여행이구나 싶었다.


삼십 분 정도 긴 산책을 하며 걸어가니 A부장님이 추천해주신 책방이 나온다. 책방 두 곳을 열심히 헤집고 다닌 뒤에야 한 에세이 책이 눈에 들어와 집었다.(한 눈 파는 직업_김혜경) 프롤로그까지 술술 읽히는 게 이 책이라면 다 읽을 수 있겠다 싶어 당차게 계산대로 향했다. A부장님이 혼자 여행할 때에는 그 동네 책방에서 책 하나를 골라 여행 내내 들고 다니며 보라고 하셨는데 이때를 시작으로 나는 책방 도장깨기를 좋아하고 심심하면 책을 읽는 사람으로 변했다. 정말이지 일 년에 책 한 권을 읽을까 말까 하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책이 너무 재밌다는 핑계로 자격증 시험은 결국 뒤로 미뤄버렸다)


[칠성조선소] 나 책읽는 사람이야! 으스대며 아주 작위적으로 찍은 설정샷

가벼운 에세이 책이라서, 작가와 동종업계라서, 커피와 빵이 너무 맛있어서, 청초호에 생긴 윤슬이 예뻐서 두 시간을 내리 앉아 책을 읽었다. 이제 혼자라는 건 안중에도 없었고 누군가의 안부를 살핀다던가 할 필요 없이 오롯이 내가 원하는 대로 끌리는 대로 하는 이 여행에 푹 빠져있었다. 여행까지 가서 카페에 죽치고 책을 읽자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정말 괜찮은지 정말 이게 재밌는 건지 내심 신경 쓰일 내 모습이 그려진다.


카페에 나와 천천히 속초 동네를 거닐며 숙소로 돌아왔을 때가 네시 반. 이 날 알게 되었다. 네시 반부터 다섯 시 반까지의 하늘이 얼마나 화려하고 근사한지.


[영랑호] 해질녘 영랑호는 도저히 사진으로 다 담아낼 수가 없다.

숙소에 돌아와 간단히 테라스에서 오션뷰를 만끽하다 영랑호 뒤편으로 붉은빛을 내뿜으며 넘어가는 해넘이를 보고 영랑호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제발 다 넘어가지 말아라 제발‘하면서 뛰어가 도착한 영랑호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산 뒤로 저무는 햇빛이 산 사이사이로 비치고 하늘은 노랗고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한 장관에 가슴이 벅차기까지 했다. 자연경관을 보고 벅찬다며 눈물을 훔쳤다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전혀 공감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질릴 정도로 자주 왔던 강원도에서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낄 줄이야. 너무나 벅차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삼십 분 넘게 지켜만 보고 있었던 듯하다.


해가 거의 넘어갔을 즈음 행여나 금방 깜깜해질까 하는 걱정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숙소로 향하는데 또 한 번 벅차지 않을 수 없었다.


숙소 앞 해변가에서 본 핑크 노을

붉게 물든 노을에 흠뻑 감성 젖고 나왔는데 이번엔 핑크빛으로 물든 하늘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분명 강원도 바다는 질릴 정도로 많이 봤었는데 그동안 내가 다녀간 속초와는 모든 게 너무나 달랐다. 또 한참을 바닷가 앞에 서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핸드폰 없이, 다른 사람과의 시시콜콜한 대화 없이 그 순간에 그렇게 깊게 빠져본 적이 처음이었다. 두 번 연속으로 과분히 벅찼던 마음을 주워 담고 싱싱한 모둠회와 속초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혼자 하는 여행이 뭐 얼마나 그리 의미가 있을까,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함께하는 여행이 진짜 여행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속초에 다녀온 이후 인생의 터닝포인트라도 맞이한 마냥 나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보다 지인들의 안부를 많이 살피는 세심한 사람이었다. 매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항상 상대를 신경 쓰고 공감대를 형성하려 하기 바쁜. 내가 하루 종일 책에 빠져있을 수 있는 사람인지, 노을을 보고 가슴 벅찰 수 있는 사람인지, 혼자 시장을 누비며 웨이팅도 해보고 일출을 본다고 꼭두새벽에 나왔다가 커피 한잔 사들고 가 아침 햇살에 책 읽을 줄 아는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하며 신기했고 매일 똑같던 하루가 전혀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야 나를 명확히 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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