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작이다. 갑자기 생각이 멈추고 멍하니 앉아있다. 원래 쓰려던 글이 잘 안 써져 그런지 생각이 다른 데로 번진다. 옆을 보니 딸아이가 혼자 라면 상자를 뒤집어 이리저리 구멍을 내고 파란색 물감으로 색칠한다. 거침없이 일을 해내고 있는 걸 보니 본인이 생각한 대로 잘 되나 보다. 머릿속에 서로 다른 생각이 뒤엉켜 자판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가만히 있는 나보다 낫다.
방법은 다를지라도 나도 이 녀석도 뭔가 마음에 웅크리고 있지만 뜬구름 같은 생각을 현실에 토해내려 필사적이다. 누구나 내 '목소리'를 내고 싶은 건 본능인가 보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 목소리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항상 배경의 역할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지금은 배경도 할 바엔 멋들어지게 해야 한다는 지론이 있다. 그러나 그땐 누군가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모습을 보면 부러웠다. 내 머릿속 생각을 내 목소리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건 슬픈 일이었다. 어떤 선생님은 원래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사람 같다고 직면시키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자기 색깔을 만드는게 중요하다고 돌려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수록 나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계속 주위의 그런 메시지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말을 잘 못하는 정신과 의사라.... 그 당시에는 고통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 목소리를 낸다는 것과 말을 잘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라는 것을 조금씩 이해했다. 예전에는 두 가지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부러워하고 갈망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말을 잘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 같다. 잘하는 사람을 보면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쓰는지 혀를 내두를 때가 있다. 물론 연습을 통해 이룬 거라 할 수 있겠지만 말을 잘 못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냥 타고났다고 해야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내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다르다. 이는 나만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삶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잘한다 못한다를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라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나라는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고, 나라는 사람이 어떤 희로애락을 느꼈고.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아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온전히 나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선 내성적 성격인지 외향적 성격인지 중요치 않다. 그런 성격 유형에 따라 표현하는 방식이 각자 달라질 뿐이다. 외향적 성격의 사람은 여러 사람 앞에서 그것을 직접 이야기할 것이요, 내성적인 사람은 일기장이나 작은 메모로 그것을 남길뿐이다.
내 목소리를 내는 연습을 한다는 것은 내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요. 나를 사랑하는 과정의 첫 단계이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슬픈 결론이 날 수도 있고 해피엔딩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 조차도 무시했던 내 삶의 작은 부분을 소중히 들여다보는 그 경험이 중요하다. 마치 음악가들에게 인간의 몸이 울림통이요 악기가 되는 것처럼 내 삶의 희로애락이 내 목소리가 된다. 일례로 아무 의미 없이 수백 번 반복했던 피곤한 퇴근길이 내 목소리의 영감을 주는 재료가 되는 순간 또 다른 의미를 갖고 경험될 것이다.
나는 이제 말 못 하는 사람이어도 괜찮다고 스스로 되뇐다. 배경이 되어도 괜찮다. 존재감이 없더라도 실망하지 않으련다. 대신 나에게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의 회노애락을 소중히 여기고 기억하려 한다. 아마 언제가 그게 내 목소리가 되어 나올 것이다. 어느새 딸내미는 자기 만들기를 다 했는지 방에 들어가 동생과 놀고 있다. 만들 때만큼은 온 집중을 다하더니 내려놓을 땐 미련 없다. 나도 괜히 혼자 이야기에 너무 빠져들지 않는 게 좋겠다. 하루가 가기 전에 다시 쓰던 글을 끄적여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