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마음이 울적해지는 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그럴 시기잖아요, 괜찮아질 겁니다.'
다른 분들에게 그런 위로를 건네면서 정작 나 또한 떨어지는 낙엽을 응시하게 됩니다
울적한 마음을 씻어줄 좋은 글을 찾아 피천득 선생님의 '봄'을 읽었습니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사십까지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들은 93퍼센트가 사십 미만 인물들이다. 그러니 사십부터는 여생인가 한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힐링을 받을 거라던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글의 끝자락을 읽다가 한번 더 눈을 크게 뜹니다.
"봄이 마흔 살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옵니다. 웃음이 나오면 안 되는데, 나는 아직 그렇지 않다고 외치며, 받아들이면 안 되는데 그게 어렵습니다. 사실 피천득 선생님의 글은 이런 느낌이 아닙니다. '봄을 기다리는 건 헤어진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기쁜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봄을 기다리며 젊음을 떠올리는 선생님의 감상이 글 속에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휘젓는 몇 개의 문장만 눈에 들어옵니다. 아마 가을이라 그럴지도 모릅니다.
짧은 웃음 이후에 정신이 바짝 듭니다. 이제 '봄'처럼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찾아와 내 피를 용솟음치게 만드는 건 없을 겁니다. 잃어버린 젊음은 꼭 나이만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내 마음이 축 늘어지는 건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두 눈 부릎뜨고 글을 쓰고 있나 봅니다. 감상에만 빠져 있을 수 없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신을 깨는 믹스커피 한 잔을 훌훌 들이킵니다. 참 신기하게도 시니컬하게 다가왔던 피천득 선생님의 글귀가 나를 정신 차리게 만듭니다.
"잃어버린 젊음을 안갯속에 잠깐 만나는 일이 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나의 기쁨의 하나는, 글을 통하여 먼발치라도 젊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 피천득의 '봄'에서 발췌
먼발치에서라도 젊음을 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겁니다. 물론 그것이 거창한 일이나 나에게 돈을 벌어주는 일이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남들에게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도 나에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글을 쓰다 몇몇 친구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여러분도 그 ‘무엇’을 갖고 있는 행복한 사람이길 바랍니다. 가을에 날씨가 추워지는 건 감상에 빠진 나에게 정신 차리라고 물 한 바가지를 끼얹는 자연의 섭리인가 봅니다. 정신 차리고 다시 일해야겠습니다. 여러분도 피천득 선생님의 '봄'을 읽고 저와 같은 느낌을 받으셨다면 가을에 조심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