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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중 Apr 19. 2021

'자존감' 이전에 '존재감'

존재감: 사람, 사물, 느낌 따위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느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느낌


그러나 내 생각에 존재감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을 유심히 지켜보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성장하고 자라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는 경우가 많다. 어린이집에서 말도 아직 서투른 아이들이 선생님의 질문에 서로 손을 들고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려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존재감은 고차원적인 심리학 개념이나 철학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하나의 욕구이고 본능에 가깝다. 우리가 배고프면 먹고 싶고, 졸리면 자야 하는 것처럼 욕구의 문제는 항상 우리 삶을 좇아 다닌다. 존재감도 마찬가지다.


아이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이어간다. 투명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며 조언을 구하는 어린 학생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조회수와 좋아요, 구독, 알림 설정에 집착하는 성인들, 내가 아직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명, 즉 사라지는 존재감을 지켜내려는 노인들까지 존재감에 대한 이슈는 사람의 일생을 두고 따라다닌다. 누구나 한 번은 그것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 스스로 정의 내려야 넘어갈 수 있는 발달 과제와 같다. 


'나'만의 존재감을 찾았나요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나 또한 존재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나는 '존재감'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생각을 똑부러지게 표현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유머가 있어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지 못한다. 게다가 굳이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를 나눈다면 당연히 내향적인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단적으로 몇 년간 수련했던 병원에서 누군가는 '너는 여기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로 내 존재감에 대해 평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그 이야기가 많이 거슬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대신 한 가지 잘못했던 것은 존재감이 없으면 스스로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존재감이 없다 보니 왠지 내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처럼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종류의 고민을 덜 하게 됐다. 이는 이런 종류의 존재감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나서다. 존재감이라 생각했던 느낌은 상당히 상대적이었다. 그리고 조직에서 나를 어느 정도로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어쩌면 성격과 같은 내적 요인보다 조직에서의 역할과 필요와 같은 외적 요인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존재감이 없는 개인적인 이유, 중언부언한다, 목소리가 작다, 의기소침하다 등등의 설명은 단지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귀인 시키기 위한 변명인 경우도 많았다. 결국 존재감은 남들에 의해 정해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의 확장과 함께 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미친 존재감을 만들지,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욱 돋보일지에 대한 바로 적용 가능한 방법을 찾는데 더 신경을 쓴다. 외모를 가꾸고, 말을 잘하는 방법을 배우거나 또는 자신의 스펙과 힘을 쌓아 어떻게 남들보다 우월하고 힘 있는 사람으로 보일지 말이다. 물론 이 또한 존재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존재감의 단편만 이해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에 대한 느낌은 나보다 더 우월한 사람을 마주친 순간 또다시 무너지는 경험을 반복한다.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그 사람을 고통의 나락에 빠뜨릴 수 있다.


결국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으로 시작됐던 존재감에 대한 고민은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었다. 나 또한 내 미미한 존재감에 대한 무거운 마음이 '그럼 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니? 네 삶에서 너는 무엇을 원하고 있니? 너를 이루고 있는 소중한 것은 뭐니?'와 같은 질문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나의 존재감을 만들어 가는 기초가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남들이 인정해줄 만한 존재감이 있고 없고 보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존재감'을 찾는 마음의 여정을 하고 있는지 여부다.


자존감 이전에 존재감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한동안 '자존감 (self esteem)'이라는 심리 개념이 화두가 됐다. 자존감이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라 스스로 믿는 마음이다. 당연히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행복을 느낄 자격이 있다. 반대로 고통에 휩싸여도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감내하는 힘이 있다.


존재감과 자존감은 남이 내리는 평가가 아니다. 둘 다 스스로 자신(self)에 대해 내리는 평가다. 차이가 있다면 존재감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를 기반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라면, 자존감은 자신이 느끼는 '자신'에 대한 평가다. 당연히 아직 자아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유년, 청소년 시절에는 남들의 시선, 즉 나를 규정하는 존재감이 '나'를 이루는 주된 느낌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내면을 키워 세상의 평가에 동등하게 대응하고 균형을 맞출 때야 비로소 자존감이 생길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자존감이란 공부를 해서, 아니면 몇 번의 성공 경험으로 얻어지는 게 아닐지 모른다. 법정 스님이 '행복은 요구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자존감 또한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할 성질이 것이 아닐 수 있다. 이는 고통을 마음에 담고, 성장하며, 자신의 마음을 확장하며 살아온 이들에게 주어지는 삶의 결과물일지 모른다.


그래서 정신과 상담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을 어떻게 높이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을 묻지만 명확한 답을 주기 어렵다. 대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지 눈여겨본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성장하면서, 타인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법부터 배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지만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방법을 먼저 익힌다.


성인이 되어 분노에 가득 찬 사람을 보면, 역설적으로 과거 무기력하게 자신을 지키지 못한 경험이 많다. 과도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정당한 자신의 욕구가 좌절당한 경험이 있다. 이들은 좌절된 욕구를 더 이상 무시받지 않기 위해 반응적으로 강한 방식을 선택한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세상과 자신의 경계(boundary)를 만들 수 있으며 이는 남에게 휩쓸리지 않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존재감을 키워나간다.


이런 존재감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그들이 주는 특별한 느낌이 있다. 우선 그들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그들 옆에 있으면 자신의 힘든 감정을 편안하게 품어줄 것 같은 기대를 갖게 만든다. 물론 친한 친구처럼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거나 해결책을 알려주는 건 아니지만, 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한껏 짓눌렀던 자신의 문제가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멋이 있다. 자기 삶에 집중하는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feeling good) 만드는 모습도 매력적이다. 그도 사람이라 고통과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지만, 그 고통을 마음에 담고 살아감에 우리는 인간다움을 느낀다. 결국 이런 모습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자존감 이전에 존재감이 있다.


자신을 지키는 삶의 방식-'조금' 이기적으로 사는 법


치매 노인을 보다 보면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의 기억으로 회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를 보면, 자신의 존재감이 가장 뚜렷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 가정 내 가장이나, 집안 살림을 온전히 책임져야 했던 시절, 일을 하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이로 인해 인정받았던 시절,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시절, 또는 아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엄마 아빠를 찾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는 아마 내가 존재감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된 계기일지도 모른다. 치매 노인이 사라져 가는 자신을 위해 선택한 방식이 그들의 존재감을 지키는 것이라면 이는 그들에게만 중요한 이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모와 중요한 돌봄자의 역할이 큰 유년 시절과 달리 성인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감을 키워나갈지 방향을 잡는 게 쉽지 않다. 그리고 이는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정도로 변화를 갖기 어렵다. 항상 어떤 일이든 첫걸음은 그런 존재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같이 지켜보며, 자신의 경우에 맞춰 적용해보는 시도라 생각한다. 대신 그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의 성공스토리를 살펴보는 것이나 처세술을 배우는 것과는 다르다. 누구나 경험하는 평범한 일상에서 존재감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게 의미가 있다. 


그것을 위해 평범한 사람들의 '조금' 이기적으로 사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완전히 이기적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는 것도 아닌 '조금' 이기적인 삶의 방식 말이다. '조금' 이기적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내 뜻만 관철시키며 사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궁극적으로 내 마음을 지키고자 하는 삶의 방식이며, 나의 존재감을 찾기 위한 첫걸음이 된다. 그리고 아래 세 가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으로 이런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가고자 한다.


자신의 욕구를 이해한다는 것. 

내 존재감을 결정할 두 명의 인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착각. (마음의 심리 도식)


역설적으로 사람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내면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남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감하는 능력 또한 확장된다. 자신의 마음조차 지키지도 못하면서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기에 '조금'이기적으로 사는 방식이 욕구의 충돌로 이어질 거라는 걱정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 이기적으로 생각하자면 이 과정을 통해 누구보다 '나의 존재감'을 확장하고 새 삶의 안식을 찾았으면 하는 바램이 제일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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