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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중 Apr 21. 2021

산책길

어린 아들과 같이 길을 걷다 보면 열 보에 한 번씩은 가던 길을 멈춘다. 세상에 뭐가 그리 재밌는지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꽃도 봐야 하고, 길바닥에 그려진 이상한 얼룩도 지나치지 않는다. 아비 입장에서 지나가는 차도, 자전거도, 사람도 조심시켜야 하니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을 일 분 이상 넘기면 안달을 낸다. '이제 그만 가자.'


차도를 건너 공원에 다다르니 어린 아들이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키며 집중한다.

'저 작은 세상 안에서 무슨 생각에 빠져있길래'

궁금한 생각에 나도 허리를 굽혀 아들의 손가락을 따라가 본다. 지켜보다 보니 조용했던 세상이 열리며 와글대는 움직임과 생동하는 시끌벅적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작은 개미는 줄을 지어 길을 만들고, 푸릇한 잡초는 그 안에서 숲이 된다.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던 과자 조각은 살아 움직이듯 가지런하게 줄을 서는데, 또 다른 미지의 생물을 만난 것 같다. 개중에는 꼭 줄을 이탈하여 자기 맘대로 가는 개미도 있다. 남들과 다른 여정을 떠나지만 결국 집으로 가는 길은 이어진다. 조금 더 고개를 드니 꽃이 흔들리는데 철쭉도 민들레도 한들한들...


고개를 돌리니 어린 아들은 또 혼자만의 세계에 빠졌나 보다.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사람'보다 이런 '작은 세상'에 먼저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단순히 자신이 더 큰 힘을 부릴 수 있는 세상에서의 전능감을 즐기는 걸까. 글쎄, 지켜보니 아들은 작은 개미라도 다가오면 소스라치게 무서워하며 뒤로 물러난다.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 와 줄지은 개미를 찔러보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지켜보기만 한다. 그래도 뭐가 재밌는지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얘는 이렇게 하고 있다, 쟤는 저렇게 하고 있다.' 본 걸 말할 뿐이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을 관조(觀照)하는 건 어쩌면 원래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타고난 본성일지 모른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본다는 자체보다 ‘무엇을 보는지 중요한  같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무엇도 ‘사람 보인다.  마음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려 그렇게 애쓴다.  사람이 나에게 무슨 의도로 저런 이야기를 할까, 저런 말을 하는  보니  이렇게 행동하겠지, 누군가의 속마음을  번이라도 맞추면 우쭐대고, 모르면 불안해한다. 살면서 사람에게 상처 받고, 사람을 무서워하는 순간부터 어른 눈에는 '사람' 보이기 시작한다. 무섭고 두려우면 그것만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관조(觀照)란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세상 만물 중에 '사람’을 관조하는 건 어렵다. 오히려 사람은 계속 보고 있으면 집착이 생긴다. 누군가를 마음에 떠올려 놓고 혼자만의 희로애락을 곱씹고 떠나보내지 못한다. 만약 타고난 관조(觀照)의 본성이 발휘되면, 삶이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사람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현실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실에 귀를 기울일지 모른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면 외롭고 쓸쓸하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집착하고 상처 받으며 사는 운명에 순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직도 어린 아들은 줄지어 지나가는 개미를 유심히 보고 있다. 지금 아비로서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어린 아들이 지금처럼 자신의 눈 앞에 벌어지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것 뿐이다.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관조만 하다 보면 또 길을 갈 수 없다. 때가 되면 다시 두 다리를 짚고 일어나 길을 가야한다. 그건 단순히 책임이나 어쩔 수 없는 굴레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요, 어쩌면 새로 가는 길에 또 다른 우연을 만나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아들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 길을 따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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