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주일학교 책을 들고 언니들과 성당을 향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인 우리 집은 하느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어릴 때는 생각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성수를 온 집안에 뿌리는 엄마였다. 성당에 안 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기 때문에 그 어떤 불만도 얘기할 수 없었다.
다른 많은 집도 우리와 비슷하게 살 거라로 생각했다. 주일에 아빠의 하얀색 포니를 타고 온 가족이 성당으로 향했다. 우리 가족은 총 7명인데 뒷자리에는 언니들과 빼곡히 앉았다. 성당 근처에 도착할 때면 마음 한쪽이 불편해지고 가슴이 뛰었다. 성당 입구 가운데 차를 주차하고 한 명씩 나오는 것은 동네의 작은 성당에서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한 차에서 형제들이 줄줄이 내리는 게 싫었다.
지난번에 합창단 오빠가 우리가 한 명씩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와. 해도 해도 끝이 없네? 얘네 집은 비엔나소시지 같아. 하하.”
낄낄거리며 웃는 얼굴에 욕바가지를 해주고 싶었다.
‘나도 보통의 4인 가족이면 좋을 텐데.’ 차에 타며 공간을 여유롭게 쓰는 식구가 작은집이 늘 부러웠다. 우리 집은 차의 기본인원 5명보다 2명이나 많은데 온몸을 구겨 타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온 가족이 성가를 부르고 미사를 드린 뒤에는 성당 근처의 튀김 도넛 가게에 들렀다.
갓 튀긴 보송보송한 도넛에 설탕을 가득 찍어서 한입 베어 물 때면 아까의 상한 기분은 싹 달아났다.
생각해 보면 대식구였던 우리 집의 환경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형제가 많아서 늘 먹는 것에 경쟁이 치열했지만, 그 덕에 그 어떤 음식도 편식 없이 잘 먹었다. 그렇게 쌓인 눈치는 어디서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무던하게 지나갔다.
이렇게 찬바람이 부는 날씨가 되면 인상 깊었던 추억이 있다.
온 가족이 모여서 종종 만두를 만들어 먹었다. 엄마는 돼지고기와 김치 갖은 채소 등을 넣고 소쿠리 가득 양념을 만들었다. 아빠는 밀가루와 물을 적절히 배합해서 만두피를 준비했다. 쫀쫀한 반죽을 만들어서 한주먹 떼어내 최대한 길게 만들었다. 그것을 소시지 자르듯이 1센티씩 잘라내면 언니들과 옹기종기 모여 작은 밀대로 밀어서 만두피를 만들었다. 거실에 큰 상을 펴고 온 가족이 모여서 만두를 빚었다. 밀대로 밀어서 만든 만두피의 크기는 제각각 달랐다.
힘차게 밀대로 밀면 만두피의 크기는 마술처럼 커졌다. 오밀조밀 고사리손으로 만든 다양한 모양의 만두를 찜기에 쪄서 온 가족이 맛을 보는 그 시간이 행복했다.
어른이 되면서 직접 만드는 손만두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손만두의 여러 가지 수고로움을 알면서도 묵은 김치향이 가득한 두툼한 만두를 보면 어린 시절 고사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 본 그 만두가 자꾸만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