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해서 의지가 되는 게 인생이라면 좋겠는데
어렸을 적 엄마의 제일 싫었던 말이 있다.
“어떻게 되겠거니 하는 거 아니야??”
후벼 파는 내 속마음을 들킨듯한 그 말이 날카로운 가시같이 내 가슴을 찔러서 너무 괴롭고 싫었었다.
어떻게 되겠거니라... 그 말이 무슨 이유로 싫은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이유를 조목조목 알게 됐던 것 같다.
내 나이 서른 즈음에는 창작그림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던 나는 내 그림과 이야기를 갖는 것이 꿈이었고 그림책은 내 꿈을 이루기에 충분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가데뷔를 너무 하고 싶은 마음에 답이라도 한 듯이 연락온 출판사에 한걸음에 달려갔고 오랜 시간 더미북 수정작업을 계속했다. 오랜 수정작업 후에는 출판사에서 아무래도 이 원고로는 힘들 것 같다며 계약을 반려했다. 1년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너무 애쓴 탓이었을까? 그때의 나는 그게 너무 충격이었는지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었고 쉬고도 싶었고 뭔가 지금의 상황을 사회적으로 타당하게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어떻게 되겠거니 하며...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때 만났던 남자친구와 난 더욱 결혼이 하고 싶었다. 지친 마음을 의지하고 싶었고, 이 상황을 벗어나서 조금은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탓일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는 결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그 남자친구는 지금의 남편이 됐고.
우리는 아이두명을 키우면서 13년간의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결혼생활 13년을 하면서 느낀 것은,
결혼이란 것은 내가 지치거나 의지하고 싶었을 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상대에게 다정한 기댈 곳이 되어줄 수 있을 때 선택해야 하는 것 같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내가 기대한 만큼의 의지를 못 받으니 마음속 공허함이 커져갔다.
그때의 나도 “이 남자와 결혼하면, 어떻게든 되겠거니” 하며 내 인생을 맡겨버린 게 아닐까.
결혼을 후회하는 게 아니다.
그때의 내가 좀 더 나에게 집중하면서 바닥 깊숙이 내가 싫었던 내 숨겨진 모습을 마주하는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한 게 아쉽다.
어차피 그때 내가 못한 아쉬운 마음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고스란히 내 문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결혼을 안 한 지인들이나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보면 응원하고 싶어 진다.
어떻게 되겠거니가 아니라 '어떻게든 부딪쳐 볼꺼야' 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고 치열하게 돌파하려는 그 모습이 너무 근사하고 멋지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든 해볼 거야!’를 시도해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