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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Apr 09. 2018

태교의 현실

  아기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꼭 덧붙이는 말이 있었다.

  “태교는 잘 하고 있어?”

  그럴 때마다 나는 모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태교를 잘 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하고 있는 게 없었으므로. 태교가 뭔가요, 먹는 건가요.

  아기를 갖기 전에는 나도 태교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거실에서 배를 쓰다듬으며 아기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름다운 임산부가 되고 싶었다. 원래도 음악을 좋아하고, 책 읽는 것도 좋아하니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 태교가 뭐 어렵겠나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일단 가장 큰 장애물은 입덧이었다. 출퇴근하는 시간에 주로 음악을 들었었는데 음악으로는 입덧이 달래지지 않았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우아하게 출근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 속의 나는 웃기는 이야기가 나오는 라디오만 찾아듣고 있었다. 모차르트 같은 걸 들어야 아기 머리가 좋아진다는데. 미안, 아가야. 일단 엄마가 먼저 살아야겠구나.

  음식 태교는 당연히 못 했다. 단백질을 많이 먹고, 인스턴트나 밀가루 음식은 끊어야 한다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고기는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고, 탄산이 들어있는 차가운 음료수만 당겼다.

  걱정스러운지 남편이 의사에게 탄산을 많이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그런데 의사의 말이 사이다였다. 술이랑 담배만 아니면 다 괜찮으니 입덧할 때는 뭐든지 넘어가는 걸로 먹으라고 했다. 그 날 이후로 면죄부를 받은 사람처럼 사이다에 얼음을 띄워 들이켰다. 그래봤자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3초 정도 뿐이지만 그거라도 어디인가.

  임신 이후로 뚝 떨어진 체력도 태교를 방해했다. 집안일은 남편이 다 해주고, 회사에서도 배려를 많이 받는 편인데 매일 야근을 하는 사람처럼 몸이 무거웠다. 느낌만 그런건가 했는데 입 주변이 다 부르트고 포진까지 생겼다. 상황이 이러니 집에 오면 매일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 것도 기력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라는 걸 임신을 하고서야 알았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임신 초기를 다 보내버리자 아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14주가 지나면서 입덧이 조금씩 사그라들었고, 그제야 태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함께 아기에게 읽어줄 책을 샀다. 아기에게는 아빠 목소리가 더 잘 들린다기에 이야기를 읽는 역할은 남편이 맡았다. 저녁을 먹고 나면 남편은 내 배 가까이 얼굴을 대고 책을 읽어줬다.

  “똘망아. 오늘은 양치기 소년 이야기야. 옛날에 양치기 소년이 살고 있었어요…….”

  나의 배를 쓰다듬으며 동화책을 읽어주는 남편의 모습은 꽤나 사랑스러웠다. 강아지 흉내를 내기도 하고, 여우 성대모사를 하기도 하는 남편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이런 게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기복이 심한 커플. 연애할 때에도 꿀 떨어지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별 아닌 일로 감정이 상해 헤어지네 마네 하는 게 하루 걸러 한번이었다. 임신을 하면 남편이 져주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었는데 나의 남편은 임신했다고 져주고 그런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하루는 바람 쐬러 가자며 준비를 하다가 아침도 먹기 전에 싸움이 붙어 울면서 동네 카페로 가출을 했다. 커피 냄새가 흐르는 카페에 앉아있자니 갑자기 배가 고파오며 아기 걱정이 됐다. 이렇게 싸우고, 울고, 굶기까지 하면 아기한테 괜찮을까?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카운터에 가서 치즈토스트와 딸기 라떼를 시켰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온 여자가 한 상 제대로 차려먹으면서 웃음이 났다. 그렇게 아기가 걱정되면 싸우지를 말든가.

  잠시 후, 나를 찾아 나온 남편도 내가 먹은 것들의 흔적을 보더니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싸우고 나와서 뭘 이렇게 많이 먹었냐.”

  “그럼 어떡해. 아기가 배고플지도 모르는데.”     

아기가 배고플까봐 울면서 먹었던 치즈토스트와 딸기라떼


  인생을 살면서 로망과 현실이 다른 건 많이 겪어봤다. 스무 살이 넘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지만 사실 모든 게 그 때부터 시작이었고, 서른 살이 넘으면 삶이 안정될 줄 알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태교도 마찬가지였다. 아기만 생기면 좋은 것만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 속의 나는 입덧과 피곤함과 감정기복 등 오만가지에 휘둘리며 로망과 너무 다른 태교를 하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돌아보면 엄마가 되어야 할 사람이 아직도 철이 없구나 싶었다.

  그런데 인생 선배들이 내게 해주는 말이 다 똑같았다. 엄마 마음이 편한 게 제일이야.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마음 편하게 지내.

  그 말을 여러 번 들으면서 마음이 좀 편해졌다. 사는 데 정답이 없는 일들은 너무나도 많지만, 나보다 먼저 살아온 사람들이 반복해서 해주는 말들은 대부분 정답에 가까웠다. 아마 태교에도 정답은 없을 것이다. 모차르트를 들은 아기가 머리가 좋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고, 엄마가 먹는 음식과는 상관없이 아이가 건강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 마음이 편하고 즐거울 때 뱃속의 아기도 행복할 거라는 말은 믿어도 될 것 같다.

  지금도 나는 피자를 즐겨먹고, 음악을 듣기보다는 TV 보는 것을 더 좋아하며, 남편과 투닥투닥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과일을 열심히 먹으려고 노력하고, TV에서 험한 장면이 나오면 고개를 돌리고, 남편과 감정이 상해도 빨리 화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나름의 태교를 한다. 이런 나의 진심이 아기에게 전해져서 뱃속의 아기가 행복하게 잘 자랐으면 좋겠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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