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8월의 나
나의 2018년 여름을 한 단어로 줄여 말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글'이다.
나는 매일같이 내가 목표로 하던 A매치 금융공기업의 공식 홈페이지의 보도자료를 읽고, 나의 정리 노트에 글로 정리했다. 그뿐인가. 금융 시사논술을 기막히게 쓰기 위해서 당시 유행하던 시사 키워드를 정리해서, 해당 키워드에 대한 배경/현황/문제점/해결방안을 내 나름대로 논술하는 연습을 반복했다.
쓰고 지우다 보면 그 자리에 묘한 흔적이 남는다. 내 머릿속에도 마찬가지다. 아무 의미 없는 행위일 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주제에 대한 글을 반복해서 쓰고 지우다보면 어느새 나의 뇌리에는 묘한 자욱들이 남는데, 그 '자욱들'을 차곡차곡 남기는 것이 이 지긋지긋한 경제 공부를 서둘러 끝낼 수 있는 방안이라 생각했다.
기말고사가 끝이 나면서 자연스레 방학에 돌입했고, 나는 조금 더 많아진 시간들을 적당히 나의 공부 시간과 여가 시간에 배분했다. 나도 모르게 여가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기는 했지만, 매일 조금씩은 글쓰는 연습을 했다. 어떠한 주제가 주어졌을 때 그것에 맞춰서 제한 시간 내에 글쓰는 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였기에, 조금 더 주의깊게 반복적으로 연습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위에 언급했던 키워드를 선정하는 일이, 지금 생각해보면, 글을 쓰는 일보다도 더 중요했다. 어떤 키워드를 선정해서 연습할 것인가, 는 효율적으로 나의 시간을 사용하는 데 꼭 필요한 고민이었다. 내가 응시할 A매치 금융공기업 필기 시험에 '등장할 가능성이 현저히 높은' 키워드를 선정해서 연습해야만, 이러한 연습이 효과가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매일 같이 보도자료를 읽으면서 내 뇌리 속에 수많은 자욱을 남겼던 키워드는 다름 아닌 '포용적 금융'과 '생산적 금융'이었다. 전자는 기존 제도권에서 포용되지 못하고 금융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금융을 가리키며, 후자는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유발하여 보다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금융을 가리키는 단어다. 지금 시점에서는 그다지 이목을 끌지 못하는 두 키워드들이지만, 2018년 여름 당시만 해도 이 두 키워드는 금융공기업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 키워드를 중점적으로 파고들었고, 결과적으로는 A매치 금융공기업 시험에서 이를 활용하여 시사 논술의 답안을 나름 유려하게 써내려갈 수 있었다.
이처럼 키워드에 맞는 글쓰기를 연습하다 보니, 어느새 채용 공고가 떡하니 떴다. 내가 응시하고자 한 경제학 분야는 채용예정인원이 고작 13명 이내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경영학/법학 능력자들에 대한 수요보다 경제학 실력자들에 대한 수요가 기업 측면에서는 좀 더 떨어질 수 있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결과적으로 13명 안에 들 수 있을 지, 결코 확신할 수 없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이제 막 7개월 정도 되었으니, 사실 이번 해는 경험삼아 쳐보는 거지, 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일생일대에 처음으로, 자기소개서라는 것을 이때 처음 써보았다. 중고등학교는 그냥 입학했고, 대학교는 정시로 입학했으니, 자기소개서를 제대로 써봤을 리가 없었다.
첫 질문부터 난해했다.
지원동기는 무엇입니까?
여기서부터 생각에 잠겼다. '난 왜 이 기업에 지원하고자 하지?' 솔직히 말해서, 붙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지원했다. 별다른 스펙이 없었기에, 자기소개서가 '적/부'인 기업에 지원해야만 했고, 그중에 가장 끌리는 기업이 이 곳이라서 지원했다. 하지만 그렇게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제가 (*)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 금융시장의 안정과 금융소비자의 행복을 추구해온 (*)의 가치가 도덕과 공공선을 중요시하는 저의 가치관에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1사 1교 금융교육 등 금융교육 프로그램들의 취지와 성과를 보도자료로 접한 뒤 이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 지식과 이해도를 바탕으로 제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경제 공부를 하면서 내가 늘 되새겼던 동기는 아니다. 나의 진짜 지원 동기(motivation)는 '얼른 붙어서 돈 벌기'였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채용 담당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진심은 위 문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본 데서 출발했다.
요컨대, 나는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정말 제대로 '글'을 썼다. 시사 키워드를 잡고 주어진 시간 내에 빠르게 글을 쓰던 연습을 하다가, 외려 자기소개서를 쓰다보니 내 삶을 천천히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왜 이 길을 택했지?', '나는 왜 돈을 벌고 싶지?', '나는 지금까지 뭐했지?', 그리고 '나는 누구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차가운 자기소개서의 프레임에 내가 자발적으로 갇혔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나는 기나긴 글을 작성해서 제출했던, 8월 말을 지나보냈고, 참으로 더 열심히 살았던 9월을 맞이했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