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음악과 음악의 부재
작곡이 점점 더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종종 음악을 둘러싼 표면의 구조들에 매몰된다. 기보는 정교해지고, 알고리즘은 미세해지며, 구조는 자율적 언어처럼 작동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후, 음악은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이 악보는 무엇을 들리게 하는가?
종이 음악(Paper Music).
그것은 분명한 하나의 작곡적 태도이자, 현상의 이름이다. 종이 음악이란 결국, 연주되는 것보다는 쓰여지고 평가되기 위해 존재하는 음악, 혹은 더 극단적으로 말해,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읽기 위한 음악이다. 이 음악은 연주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듣는 이를 상정하지 않는다. 소리를 구현하는 것보다, 구조적 완결성과 시각적 정교함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음악이기 이전에 문서이며, 소리보다는 설계도에 가깝다.
신낭만주의의 옹호자들은 고전적 관현악 청중을 대상으로 음악을 쓰고, 반면 "종이 음악"을 쓰는 이들은 무엇보다 먼저 작곡 콩쿠르의 심사위원단을 대상으로 음악을 쓴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에, 작곡가와 청중 사이에 실제로 어떤 소통이 존재하는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종이 음악이라 불리는 작곡 경향은 악보의 구조와 복잡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그러나 이때 악보는 더 이상 음악을 전달하는 매개가 아니라, 스스로의 미적 대상으로 기능한다.
종이 음악의 큰 문제는 지도와 지형을 혼동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지도는 지형을 대체할 수 없다. 지도는 부호화된 축소와 재구성일 뿐, 실제 지형은 그 위를 걷고 숨쉬는 물리적 실재다. 마찬가지로, 악보는 음악을 위한 도구일 뿐 음악 자체가 아니다.
음악은 오직 소리가 되었을 때, 공간 속에 울려 퍼질 때, 청중의 인지와 감각 속에 스며들 때 비로소 실재한다. 종이 음악은 이 가장 단순하고도 본질적인 원칙을 망각한다. 기보가 지나치게 중요시되고, 악보의 구조와 완결성이 자율적 미학으로 치환될 때, 음악은 더 이상 소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일종의 자폐적 체계의 구축이다.
종이 음악의 미학은 종종 개념의 예술화를 동반한다. 즉, 소리와 청각적 경험보다는 작곡적 프로세스, 알고리즘, 조합법, 기보 체계 자체가 예술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개념은 음악에서 배제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개념이 실현 가능한 소리의 경험과 분리될 때, 음악은 스스로를 부정하게 된다.
실현될 수 없는 거대한 음악적 아이디어를 작품 대신 문학적 서술로만 남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의 Euphonia, 그리고 실제 소설 대신 소설의 비평만으로 철학적 사유를 남긴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방식은, 개념이 실재를 대체할 수 있는 예술의 경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음악은 문학이 아니다.
오늘날 종이 음악은 음악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문학이나 철학에 더 가까운 행위로 이어지고 있다. 음악은 개념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이론이나 복잡성이 과도할 경우, 그것은 결국 악보와 그 시각적 양상에 지나치게 큰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다. 나는 복잡한 음악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복잡성이 음악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 때, 그 구조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나 복잡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기 위한 복잡성, 읽히기 위한 기보, 분석되기 위한 작곡은 음악의 존재론적 기반을 위협한다. 기보된 구조가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소리와 연결되지 않는 순간 음악은 사라진다.
악보는 여전히 단지 상징적 표현에 불과하다. 그것은 근사치이며, 연주자들에게 전달되는 암호화된 메시지이지, 그 자체로 음악적 현상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명백한 딜레마와 마주하게 된다. 즉, 연주의 정밀도인가, 기보의 정밀도인가? 사실, 정밀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을 창작하고 그것을 듣는다는 것은 왜곡의 행렬을 겪는 것이다. 아이디어에서 형식으로, 형식에서 악보로, 악보에서 연주로, 연주에서 청각으로.
복잡함과 정교함이 미학이 될 수는 있지만, 소리 없는 복잡성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악보가 아무리 완벽해도, 그것이 들리지 않는다면 음악은 사라진다.
작곡가는 결국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다. 기호를 통해, 절차를 통해, 알고리즘을 통해 무엇을 구성하든, 그것은 최종적으로 들릴 수 있어야 하고, 청중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음악은 종이에 쓰여진 악보가 아니라, 그 악보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울릴 때, 그리고 그 울림이 누군가에게 도달할 때, 비로소 살아 숨 쉬는 예술이 된다.
작곡 행위의 청각적 결과를 무시하는 것은 소통의 거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