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콜라주와 몽타주

파편과 조직

by Komponist

20세기 후반의 음악은 더 이상 단일한 양식적 정체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다중적 시간성, 이질성, 기표의 충돌, 참조의 파편화를 통해, 예술의 조건 자체에 대한 반성적 실천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콜라주(Collage)와 몽타주(Montage)는 단순한 기법을 넘어, 현대 음악이 현실을 인식하고 조직하는 방식, 더 나아가 존재와 역사, 주체성에 접근하는 형식적,미학적 모델로 부상했다.




많은 경우 두 용어는 혼용되지만, 이론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콜라주는 이질적 재료들의 병치를 통해 참조성과 의미의 충돌을 드러낸다. 원래 시각예술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에게서 볼 수 있는, 외부 세계의 파편들을 예술작품에 끌어들이는 원리이다. 음악에서 콜라주는 음악적 인용, 스타일 모방, 기성 텍스트의 삽입 등을 통해, 청자의 기억, 문화적 연상, 미디어 인식 등과 맞물려 해석의 다층 구조를 창출한다.

반면, 몽타주는 영화 이론에서 기원한 개념으로, 시간적·서사적 흐름 속에서 사건들을 배열하고 변형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음악에서 몽타주는 단순한 병치를 넘어서, 형식적 흐름에 종속된 구조적 결합, 그리고 이질적 재료들 사이의 내적 연결을 중시한다.




음악적 콜라주는 역사적으로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 운동의 우상파괴적 태도와 함께 등장했으며, 이후 찰스 아이브스(Charles Ives),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등의 작곡가들이 다양한 문화적 기호들을 병치함으로써 자기시대의 정신적 충돌을 반영했다. 콜라주의 중요한 미학적 성격은, 이질적인 텍스트와 음악의 병치를 통해 의미의 분열을 야기하고 주체의 해체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루치아노 베리오(Luciano Berio)의 Sinfonia 제3악장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말러의 스케르초 위에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텍스트가 교차하며 삽입되어, 청자에게 단일한 해석이나 일관된 의미망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해체된 의식과 중첩된 기표들의 충돌을 통해 다층적인 감각을 유발한다. 이처럼 콜라주는 음악을 하나의 닫힌 구조로서가 아니라, 참조와 파편, 병치의 전략을 통해 열린 인식의 장으로 확장시키며, 음악적 시간 또한 선형적 연속이 아닌 중첩적이고 파열적인 흐름으로 재편한다. 침머만(Bernd Alois Zimmermann)의 Requiem für einen jungen Dichter는 이러한 시학을 더욱 급진적으로 밀어붙이며, 세르게이 예세닌(Sergej Jessenin)과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Wladimir Majakowski)의 시, 정치가들의 연설, 다양한 음악 인용들이 병렬적으로 배열됨으로써,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유럽사를 비선형적으로 소환하고, 그 과정에서 역사적 상흔을 과거로 복원하거나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음향적 시공간 안에서 충돌시키고 공존시키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때 음악적 콜라주는 단순한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현재화된 기억의 장치로서 작동하며, 시간의 흐름 자체를 문제시하고, 감각과 인식의 조건을 전복하는 형식적·미학적 전환점을 이룬다.




몽타주는 콜라주와 달리, 이질적 요소 간의 형식적 관계 맺기에 중점을 둔다. 그 목적은 병치가 아니라 구성이다. 이는 전통적 형식 개념의 붕괴 이후, 형식 없는 구조 또는 조립식 진행이라는 대안으로 등장하였다. 죄르지 쿠르탁(György Kurtág)의 미니어처 연작들(Kafka-Fragmente, Officium breve 등)은 초단편의 병렬로 구성되지만, 그 사이에는 숨은 정서적 흐름과 기법적 응집이 존재한다. 올가 노이비르트(Olga Neuwirth)는 비디오 몽타주, 영화적 컷 기법 등을 음악으로 전이시켜, 시청각 콜라주를 다층적으로 교차시킨다. 몽타주의 중요한 미학은 ‘조직된 이질성’이다. 이는 구조의 해체와 유기성의 대립이 아니라, 새로운 조립의 미학이다.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의 Telemusik, Hymnen에서 제안된 Intermodulation은 콜라주의 수동적 병치를 넘어, 능동적인 상호작용의 원리로 작동한다. 여기서 음악은 스타일들 사이를 ‘이동’하거나 변조되며, 청자는 그 경계에서 새로운 청취 경험을 마주하게 된다. 이 개념은 혼종성을 넘어서, 스타일 간 감응의 작곡화라 할 수 있다. 한편, 알프레드 슈니트케(Alfred Schnittke)의 다중양식주의는 표면상 콜라주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은 인터벌 구조에 기반한 정교한 참조 시스템으로 조직되어 있다. 음악사는 여기서 소환의 대상이 아니라, 작곡의 재료로 구조화된다.




콜라주는 과거와 현재, 고급예술과 대중문화, 예술과 현실의 병치를 통해 의미의 지형을 재구성하며, 몽타주는 형식 없는 시대에 형식적 질서를 다시 묻는 전략이다. 이 둘을 넘어서 상호변조나 다중양식주의는 경계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의미와 감각을 지향한다.



keyword
이전 16화소리 없는 악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