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구조와 살아 있는 흐름
우리는 음악을 시간 속에서 경험한다. 그리고 이 시간의 흐름은 단순히 사건들의 연속이 아닌, 느껴지고, 분절되고, 구조화된 시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음악의 시간적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박자(meter)와 리듬(rhythm)이라는 개념을 구분한다. 그러나 이 구분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가, 혹은 이론과 교육의 산물에 불과한가?
전통적인 음악 이론은 박자를 일정한 주기성과 균질성을 지닌 시간의 격자로 간주해왔다. 악보 위에 명시된 박자표는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각 마디는 동일한 구조 안에서 반복된다. 박자는 시간의 법칙이며, 음악적 사건들이 발생할 수 있는 기반 구조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러한 박자 개념은 본질적으로 정지된 공간적 모델에 기반하고 있으며, 시간의 흐름을 수직적 계층 구조로 환원하는 것이다.
반면 리듬은 이러한 틀 안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리듬은 실제 음악 경험 속에서 살아 있는 시간의 감각, 즉 사건들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지속"의 흐름에 더 가깝다. 제스처처럼 표현되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때로는 예측 불가능한 긴장과 이완을 내포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리듬을 자발적이며 표현적인 시간의 예술로 간주하게 된다.
문제는 이 둘이 이론적으로 대립적인 개념으로 분리되어 설명되어 왔다는 점이다. 교육 초기 단계에서부터 우리는 박자를 숫자로 세는 법부터 배운다. 박자는 정량적이며 계량 가능한 구조로 인식된다. 반면 리듬은 그 위에서 표현되는 장식적 요소로 축소된다. 그러나 실제 음악을 연주하고 듣는 행위는 이와 다르다. 우리는 박자를 단순히 구조로 인식하지 않으며, 리듬은 박자의 틀을 벗어나기도 하고, 그것에 저항하거나 조작하며 시간의 표현으로 기능한다.
현대의 많은 음악 이론에서 리듬은 종종 주기적 반복과 관련되어 설명된다. 이는 플라톤 이후 서양 사유의 전통에서 리듬이 박자와 수적 규칙성에 결합되며 정형화된 것과 관련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고대 그리스어 "rhuthmos"의 원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난 해석이다.
에밀 벵베니스트의 언어학적 연구에 따르면, 플라톤 이전의 rhuthmos는 고정된 반복이나 수적 배열이 아니라, 유동하는 것 안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일시적 형식, 즉 "그 순간에 특정한 방식으로 흐르는 형태"를 의미했다. 이것은 일정한 틀이나 형식에 의존하지 않고, 사물이나 행위의 유일하고 변화 가능한 배열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rhuthmos는 근본적으로 개별적이고 감각적인 형식의 생성 과정이며, 그것은 반복 이전의 사건적 경험이다.
이러한 고찰은 우리가 일상에서 회화, 조각, 투수의 동작, 한 사람의 걸음걸이, 나무결 같은 정지된 대상에 대해서도 "리드미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즉, 리듬은 단지 청각적 현상이나 반복구조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인지되고 형성되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응답이다.
반면 박자는 구조적으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3/4 박자는 일정한 시간 간격이 세 번 반복되는 단위를 전제로 하며, 각 마디는 추상적으로 동일한 단위로 간주된다. 이는 뉴턴식 절대 시간 개념과 직접 연결된다. 뉴턴은 시간(time)을 사건들과 무관하게 균일하게 흐르는 수학적 매질로 보았고, 이는 음악의 박자 이론에서 시간을 동질적이고 무한히 분할 가능한 선형 구조로 환원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박자를 '그릇'처럼 이해하게 만든다. 리듬은 이 그릇 안에 채워지는 내용으로, 마디는 그저 반복되는 시간 단위가 된다. 그러나 이 개념은 시간과 리듬의 실질적 경험을 배제한다. 실제 음악은 단순한 동일 시간 간격의 반복이 아니라, 시간의 질적 차이와 순간적 긴장, 불균형, 예측 불가능성을 통해 리듬을 구성한다.
분석적 언어 속에서 박자는 측정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틀로 기능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리듬은 항상 예외와 차이를 생성한다. 다시 말해, 박자는 시간의 구조화를 시도하지만, 그 구조는 항상 미완결이며 생성 중인 시간성에 의해 교란된다.
리듬은 반복이 아니라 경험이다. 그것은 감각 속에서, 지각 행위 안에서 생성되는 형식이며, 절대로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다. 동일한 음악을 반복해서 들을 때조차, 우리는 그 리듬을 매번 다르게 느낀다. 이는 리듬이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주의, 그리고 미래의 기대 속에서 항상 변화하는 지각의 장이기 때문이다.
회화나 조각이 리드미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지만,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 안에서 리듬적 움직임의 잠재성을 발생시킨다. 리듬은 눈앞의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따라가고 이해하려는 우리의 시간적 개입 속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리듬은 단순히 반복이 아니라, 시간적 주체성과 감각적 형식화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리듬을 단순히 박자의 변주로 간주하거나, 박자를 리듬의 기계적 배경으로만 취급할 경우, 우리는 둘 사이의 본질적 관계를 간과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둘이 철학적으로 구분되는 시간 개념들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박자는 결정성과 반복, 동일성과 규칙, 측정과 예측 가능성에 가까우며, 리듬은 생성과 차이, 개별성과 창발, 감각적 지각과 경험의 비가역성에 가깝다.
그러나 리듬은 박자와 무관하거나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박자 역시 완결된 것의 결정성과, 형성 중인 것의 미완결성이라는 시간의 긴장을 내포하며, 리듬은 그 긴장의 장에서 드러나는 형식의 생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리듬과 박자를 단순히 기능적 구분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시간을 사유하고 형식화하는 이중적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박자는 사건의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며, 리듬은 그 반복 안에서 생겨나는 사건의 차이이자 생성이다.
리듬은 단지 음악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 시간 그 자체에 대한 미학적 형식이다. 그것은 수학적 시간이나 반복 가능한 주기성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의 형식이 생성되는 경험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리듬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 있는 감각으로 다시 이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박자 역시 다시 태어난다. 고정되고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의 생성에 참여하는 잠재적 구조로서의 박자, 결정성과 비결정성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생성의 틀로서의 박자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리듬과 박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우리에게 음악 안의 시간성과 형식, 그리고 감각의 철학을 사유할 수 있는 강력한 출발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