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의 비언어성과 내재적 형식
음악은 오랫동안 구조와 형식을 통해 존재해왔다. 음악 작품이란 특정한 시작과 끝, 대비와 반복, 발전과 귀결의 원리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구성된 하나의 완결된 세계이며, 작곡가는 그 구조를 설계하고 통제하는 건축가로 간주되어 왔다. 음악은 대부분 외부에서 주어진 형식적 틀 안에서 이루어졌고, 청중은 그 틀의 내적 논리를 따라 음악을 "이해"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러한 사고는 음악을 일종의 기호 체계로 간주하며, 구조와 분석, 재현과 반복이라는 언어화 가능한 질서 속에서 의미를 생산하도록 한다. 이러한 경향을 바탕으로 예술의 신비, 불확정성, 감각적 존재론은 상대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해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부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이러한 패러다임에 강하게 저항하며, 새로운 작곡의 존재론을 실험해왔다. 이들은 형식은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부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와 긴장, 밀도와 압력의 분포에 따라 생성된다고 믿는다. 또한 작곡은 언어로 설명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체계적 활동이 아니라, 언어 이전의 감각적 사유, 몸과 귀의 직관, 시간 안에서의 존재적 현현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창작 철학은 단지 새로운 기법이나 실험적 양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예술적 요청이다. 그것은 음악이 어떻게 세계를 경험하게 만드는가, 예술은 어떻게 존재와 시간에 관여하는가, 청취는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 감각의 행위가 되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현상학적 사유와 연결된다.
현대 작곡에서 일부 작곡가들은 음악의 형식과 언어라는 두 축을 의도적으로 해체하고자 한다. 이들은 음악을 더 이상 "완성된 구조물"로 보지 않으며, 그것을 해석하거나 해명하려는 언어의 시선 또한 일정 지점에서 거부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소리 그 자체가 생성되는 조건, 그 조건이 시간 속에서 남기는 흔적, 그리고 그 흔적을 감각이 따라가는 일이다. 이러한 창작 원리는 "내재적 구조", "언어와 작곡의 분리"라는 개념 아래 명료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근대 이후 서양 음악의 역사는 구조화된 시간의 미학이었다. 푸가의 대위법적 질서, 고전주의 소나타의 형식 논리, 낭만주의의 내러티브 확장, 20세기 초중반 총열주의의 수치적 배열까지, 음악은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질서를 부여받는가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작곡가는 지도를 그리는 사람, 즉 음향의 길을 미리 계획하는 설계자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내재적 구조는 이 명제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여기서 구조는 미리 계획된 지도가 아니라, 소리들이 이동하며 그려낸 궤적 자체이다. 이러한 음악은 처음부터 구조를 정해놓고 쓰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소리 그 자체가 구조를 "요구"하게 만든다고 본다. 작곡가가 외부에서 위계적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부의 물성에서 출발하여 그 자체가 구조를 형성하게끔 하는 "하향식"이 아닌 "상향식"의 형식론이다. 아이디어는 형식이 아닌 의도로 작동한다.
이러한 형식은 시간의 선형적 전개에 기대지 않는다. 음악은 더 이상 시작, 발전, 절정, 결말로 이어지는 내러티브적 연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밀도와 제스처, 질감들이 병치되고 전환되는 사건의 장이 된다. 사운드의 조직은 외부에서 주어진 틀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각 소리의 질감, 에너지 흐름, 공명 구조에 따라 내재적으로 형식이 생겨난다.
이와 함께 청취의 방식도 변한다. 청중은 예측 가능한 진행에 따라 음악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안에서 형식을 경험해야 한다. 음악은 더 이상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되는 것이고, 감각의 운동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시간의 형식이다.
이러한 작곡 방식은 미리 외부에서 강요된 형식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자라나는 형식이다. 따라서 내재적 구조는 구조의 부재가 아니라, 구조가 청취의 시간성과 음향적 궤적을 따라 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임을 뜻한다.
음악은 과연 무엇을 표현하는가? 감정인가, 이미지인가, 서사인가, 아니면 개념인가? 이 오래된 질문은 수 세기 동안 미학과 작곡이론의 핵심을 이루어왔다. 19세기 낭만주의는 음악을 "감정의 언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예술"로 찬미했으며, 이후에도 음악은 종종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혹은 "전달하는" 예술로 여겨졌다.
그러나 일부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이러한 전제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그들은 음악이 반드시 "무엇을 표현해야만 하는가"라는 사고 자체를 언어 중심적 사고의 잔재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 음악이 개념이나 감정을 "외부에서 주어진 무엇"으로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고, 그 자체로 감각되는 경험의 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작곡가들은 언어와 작곡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분리하려 한다. 작곡은 언어화된 사고나 설명 가능한 체계의 결과물이 아니라, 언어 이전의 감각적 사유, 즉 소리와 침묵, 질감과 밀도, 긴장과 해소와 같은 비언어적 요소들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경향에서 음악은 개념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의 조건, 즉 우리가 생각하기 전 이미 몸과 귀로 감각하고 있는 세계의 상태를 구성한다.
그렇기에, 작곡은 종종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 혹은 표현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다룬다. 설명을 시도하는 순간, 음악은 도망치며 숨는다. 작곡가는 이를 예술의 신비나 주관성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말한다. 음악은 설명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더 정직해질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말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언어가 예술을 지배해온 방식에 대한 철학적 저항이다. 언어는 분류하고 정리하며, 경험을 이해 가능한 체계로 환원시킨다. 하지만 예술, 특히 음악은 본질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감각의 장이며, 존재 그 자체의 진동을 다루는 사건이다. 작곡가가 언어를 거부하는 순간, 그는 예술을 감각적 실존으로 복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음악의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청중의 접근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청취자의 감각을 더욱 적극적으로 호출하고, 설명 없는 감각의 개입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예술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설명 없이 울리는 한 개의 소리, 불현듯 침묵 속에서 솟아오르는 미세한 진동이 때로는 수많은 단어보다 더 깊고 정확하게 우리 존재의 내면을 흔든다.
그러므로 "언어와 작곡의 분리"는 단순한 설명 거부가 아니다. 그것은 음악이 더 이상 전달의 매체가 아니라, 사건의 발생이며, 청취란 그 사건에 개입하고 휘말리는 존재론적 감각 행위라는 선언이다. 음악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그 세계를 다시 듣는다.
작곡은 단순히 음악적 구조를 배열하거나 소리를 조직하는 기술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존재와 시간, 감각과 생성의 문제를 다루는 형식적 실천이다. 특히 내재적 구조와 언어와 작곡의 분리를 추구하는 작곡에서, 음악은 더 이상 외부로부터 주어진 형식이나 개념을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음악은 시간 속에서 감각의 운동을 통해 형식을 생성하며, 그 생성의 과정 자체가 곧 예술이다.
여기서 핵심은 "시간"의 개념이다. 전통적으로 음악에서 시간은 형식의 그릇, 즉 이미 계획된 구조가 흘러가는 틀로 이해되어 왔다. 소나타 형식에서 A–B–A'의 구조는 시간 위에 일정한 내러티브를 흐르게 했고, 청중은 그 흐름의 규칙을 이해하며 음악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청취했다. 하지만 새로운 작곡 미학에서는 시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시간은 이제 형식 그 자체이며, 나아가 형식이 생성되는 현장이다. 즉, 형식은 시간 속에서 발생하고,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경험된다.
이러한 작곡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선형적 시간의 구분이 해체된다. 음악은 직선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소리의 중첩, 침묵의 파열, 반복의 무의미성 속에서 시간은 "층"으로 존재한다. 청중은 어느 한 지점을 이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속 속에서 감각을 갱신하고, 소리의 궤적을 따라 존재의 변형을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청취는 단순한 수용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 개입이며, 감각의 재조직이다. 청중은 더 이상 외부로부터 주어진 구조를 해석하는 해설자가 아니다. 그들은 형식을 함께 생성하는 감각의 주체가 된다. 이때 작곡은 단순히 소리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감각이 시간 속에서 형식을 어떻게 인식하고 체화하는지를 실험하는 존재론적 창조 행위로 전환된다. 이러한 음악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구조를 보여주는가가 아니라, 청중이 어떻게 존재의 틈에서 소리를 만나고, 시간이 형식을 낳는 과정을 감각하는가이다.
음악은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 즉 감각의 시간적 현현으로 작동될 수 있다. 따라서, 감각의 시간성과 형식의 생성은 예술이 어떻게 존재를 열어 보이고, 시간 안에서 형식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사유하는 방식이다. 이때 작곡가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존재와 시간, 침묵과 감각의 관계를 중계하는 존재론적 작동자다. 작곡가의 작업은 형식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이 감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나고 스스로의 질서를 갖게 되는가를 기다리고 관찰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술로서의 작곡, 존재론적 예술의 핵심이다.
음악은 더 이상 우리가 이해해야 할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 동일한 곳에 두 번 다시 머물지 않는 생성의 흔적이다.내재적 구조는 결코 형식의 해체가 아니라, 형식에 대한 존재론적 전환이다. 이러한 경향에서 작곡가는 외부에서 미리 설정된 경계를 따르는 설계자가 아니라, 소리와 시간 사이에서 형식이 자율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열어주는 존재론적 중재자다.
이러한 작곡은, 감정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음악이라는 오래된 패러다임을 넘어선다. 음악은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는다. 음악은 존재 자체를 울림으로 드러내는 매체이며, 언어 이전의 감각적 세계와 직접적으로 접속하게 한다. 설명 없이 울리는 하나의 진동, 해석 불가능한 침묵, 반복되지 않는 잔향이야말로 존재의 가장 순수한 흔적이다.
작곡과 언어를 분리하는 태도는, 예술을 신비화하려는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이 언어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인식 체계와 진동 구조를 갖는다는 선언이다. 음악은 언어를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더 정직하고 구체적인 존재가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 감각될 수 있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음악의 힘이며, 오히려 소리 그 자체로 다시 돌아가려는 회귀적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