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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과 정당성

설명의 강박

by Komponist


Everything begins as a mystique and ends in politics.
(모든 것은 신비로움에서 시작해 정치로 끝난다.)
Charles Péguy, 1873–1914



예술이 처음 등장할 때는 그것이 가진 내재적 신비와 불가해성으로서 존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권력 투쟁의 도구로 전락한다. 특히 작곡이라는 행위가 더 이상 내면의 명령이 아니라 외부를 향한 정당화의 제스처로 변질되되어간다면 더욱 그렇다.


"우연성"이라는 개념이 그러했다. 케이지(John Cage), 펠드먼(Morton Feldman)등, 이 개념을 근본적인 미학의 기초로 삼았던 작곡가들에게 훗날 유럽의 작곡가들이 이 우연성을 시스템화하고 문학적 또는 과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본질의 왜곡과 다름없었다. 불레즈(Pierre Boulez)는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와 카프카(Franz Kafka)를,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은 과학적 개연성을 끌어들여 우연성의 합리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화는 이 예술의 기원을 거세하는 행위에 가깝다. 우연성은 설명되어야 할 개념이 아니라, 느껴지고 경험되어야 할 감각적, 존재론적 조건이었다.




현대 예술가가 처한 상황은 모순적이다. 우리는 더 많은 자유를 부여받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자유는 언제나 무언가를 "설명해야만 하는 자유"다. 어떤 소리를 만들었는가보다, 그것을 왜 만들었는지 설명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사회(혹은 경향), 그리고 그 설명은 미학보다는 정당성의 수사로 포장된다. 현대 음악의 담론 공간은 필요 이상으로 이러한 해석의 강박, 정당화의 강박, 철학적 사후 설명의 강박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강박은 예술이 아니라 어쩌면 정치적 언어일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예술은 힘의 배분을 위한 명분이 된다.


음악이 사회적 명성을 얻고 담론 안에 들어가는 순간, 작곡가는 자신의 작업을 "정당화"해야만 한다. 왜 그런 형식을 택했는지, 왜 리듬을 자유롭게 열어두었는지, 왜 느린 속도를 지정했는지를 스스로 설명해야 한다. 오늘날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소리가 아니라 근거를 원하는 사회와 자주 마주한다.


오늘날 음악계의 병증은, 작곡이라는 행위가 점차 기술적 숙련도와 개념적 정합성의 경쟁으로 전락했다는 데 있다. 젊은 작곡가들은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몰두하면서, 창작의 윤리적 고립, 즉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체험하지 못한다. 작곡가는 아이디어의 설계자로 평가받고, 그가 구현한 형식과 구조, 외부 담론과의 관계성이 곧 작품의 가치를 구성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 결과, 예술가는 더 이상 내면의 필연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외부의 이론과 프레임을 "적용"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작곡이 사유가 아닌 방법이 될 때, 음악은 더 이상 듣는 예술이 아니라 읽히는 문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기교는 탁월하나,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확신의 결핍과 마주한다.


여기서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해석과 분석 자체를 부정하거나 경시하지 않는다. 실제로 나 역시 유학 시절 접한 수많은 음악 분석 세미나와 토론을 통해 작곡가로서의 판단력과 감각을 확장할 수 있었다. 소리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이론적 사고는 창작의 밀도를 높이는 데 필수적인 훈련이며, 그 중요성은 언급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현대음악계에서는 많은 작품들이 표제적 서사나 정서 표현, 혹은 추상적인 예술 개념에 대한 암시가 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 종종 기초적인 분석과 객관적인 설명의 부족이 문제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적절한 해석과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요소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이 글에서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수준을 넘어서, 음악이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철학적 언어를 동원하고, 외부의 기대와 이론적 기획에 맞춰 구조화되어야만 하는 강박에 대한 문제 제기다. 이는 단지 설명의 부족이나 과잉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화의 구조 자체가 작곡가의 창작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처럼 정당화의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작곡가들은 결국 자신을 방어할 언어를 축적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그것은 진정한 자아의 성숙이 아니라, 자기 이미지의 구축이다. 심지어 예술을 종교적 소명으로 여겨 사회에서 떨어져 있기를 바라는 작곡가조차, 현대사회에서는 발견되고, 해석되고, 모방된다. 그리고 종교적 인물이라는 이미지 자체로 더 큰 주목을 받는다.


물론 정당화라는 행위 자체가 언제나 해롭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작곡가가 자신의 작업을 스스로 성찰하고, 그것의 구조적, 철학적 토대를 다시 묻는 과정이야말로 예술의 내적 윤리를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정당화가 외부의 인정을 획득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불안을 견디기 위한 사유의 형식으로 작동할 때, 그것은 예술의 내면을 더 깊이 파고드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정당화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누구를 향한 것인가, 그리고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이다.


오늘날 작곡가는 자기 이미지와 싸워야 한다. 자신이 신비로운 존재로 보일 것인가, 기술적 권위자로 보일 것인가, 정치적 경향성과 연결된 이름이 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려한다. 음악은 점점 그 작곡가의 포지셔닝 전략이 되어버리고, 청중은 음악보다 그 사람의 정체성과 평판을 먼저 듣는다.




예술은 논리로 해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의 출현, 그것이 예술의 조건이다. 설명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는 소리, 해석이 미치지 않아도 울림으로 남는 구성, 바로 그것이 내가 믿는 작곡의 출발점이다.


나는 어떤 철학도, 어떤 작곡 기법도 내 음악을 "보증"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나와 시간 사이에 생성된 청각적 사건이다.


오늘날 현대음악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고, 아무도 설득하지 않고,

그저 들리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예술로.


마지막으로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Wer will was Lebendiges erkennen und beschreiben,

Sucht erst den Geist herauszutreiben;

Dann hat er die Teile in der Hand,

Fehlt, leider! nur das geistige Band.

살아 있는 것을 인식하고

묘사하고자 하는 자는,

우선 그 정신을 몰아내고자 한다.

그는 그 조각들을 손에 넣지만

안타깝게도, 영적인 끈은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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