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성에 대한 발칙한 정의

by 반동희

모든 능동적인 을 좋아한다. 능동적인 의사 결정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 존중받을 태도다. 타인의 능동을 침해하지 않은 선에서의 판단은 대부분 '다르다'로 귀결된다. 옳고 그름을 논하는 '틀리다'가 아닌 선택을 존중하는 다름으로 인정될 가치다. 듣고 생각하고 판단한 뒤 행하는 것은 자율이라는 또 다른 고귀한 가치의 연장선에 있는 긍정이다.


신체가 속박되더라도 개인의 사유만은 능동적일 수 있다. 신체는 구속할 수 있지만 머릿속은 떼어내 휘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엄혹한 감방에 갇힌 사람이 오로지 생각하는 힘으로 신체의 속박을 버텨내는 이유다. 실제 홀로코스트가 자행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능동적으로 사유한 몇몇 이들이 끝내 자유를 되찾았다. 능동적인 사고는 자유에서 태어나며 그 판단의 결과는 다시 자유를 가져다주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수동적인 사고는 행동을 오염시켜 정신을 가둘 수도 있다. '보이다'를 '보여진다'라고 하거나 '생각한다'를 '생각된다'로 하는 것 역시 능동성을 가로막는 수동적 사고의 결과다. 어떤 면에선 판단을 교묘히 피하려는 책략도 녹아있다. 그걸 기꺼이 감수하면서 얼마간은 수동적 인간이 되는 셈이다. 단언하는데 글이나 말에 "보여진다"라고 하는 사람 중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없다. 말과 글의 고수들도 피하는 말 중 하나다.


이를 삶에 대입해보면 '살아가는 삶'과 '살아내는 삶'으로 크게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아침 모닝콜 소리에 일어나서 끌려가듯 직장에 가고 터벅터벅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어 꾸벅꾸벅 조는 삶이 있다. 반면에 모닝콜보다 일찍 일어나 여유 있게 출근하며 지하철 그 비좁은 공간에서도 독서 같은 건전한 행위를 고민하는 삶도 있다. 아마도 대다수는 후자에 주목하면서 '저런 삶을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모두가 쓸데없는 성공담으로 나열된 자기계발서와 능동적인 삶이 꼭 미친 듯이 열심히 사는 삶이라고 지적하는 일부 미디어 때문이다.


나는 전자의 삶에서도 충분히 능동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아침 모닝콜 소리에 깨는 건 내가 이미 그렇게 시간을 맞춘 뒤 마음먹고 잔 선택의 결과다. 끌려가듯 직장에 가는 것 역시 사실은 내가 돈은 벌어야 하니까 직장에 다니겠다고 합의한 능동적 선택의 결과다. 지옥철 아니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어 꾸벅꾸벅 조는 것 또한 ‘피곤하니 잠을 자두는 게 좋다’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판단한 것이다. 누가 강제로 모닝콜을 맞춘 것도 아니고 험한 취직난에 멱살을 잡아끌어 억지로 취직시킨 것도 아니며 지하철 개찰구에 교통 카드 찍어서 밀어 넣은 것도 아니다. 특히 바쁜 아침 시간에 지하철에서 강제로 잔잔한 클래식이라도 틀어주면서 "자라! 어서 자라!"하며 재운 건 더더욱 아니다.


최근 며칠간 서울에서 가장 혼잡하다는 출근길 9호선을 타고 있는데 이러저러한 생각이 스친다. 내 자동차가 날개 달린 차가 아니라서 어쩔 수 없는 지하철 이용이지만 크게 보면 뛰어가는 것 대신 결정한 나의 판단이다. 서울의 혼잡함은 보통의 자동차쯤은 주 2일 주말 근무로 돌려세운다. 매우 능동적인 서울의 혼잡함이다. 나 역시 서울 교통의 능동 판단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다른 대안을 선택한 것뿐이다.


나는 사실 지하철에서 오며 가며 병적으로 책에 몰두해왔다. 마치 이 시간을 자거나 허투루 보내면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혀를 슬쩍슬쩍 깨물어가며 책을 봤다. 다시 말하지만 모두 자기계발서와 선생인 척하는 미디어의 폐해였다. 그러다 하루는 진짜 누가 지옥철 아니 지하철에 클래식을 틀어 놓은 것 같아 곤히 잠을 잤다. 결과는? 매우 다시 태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앉아서 가는 것도 로또 당첨인데 거기에 연금복권까지 맞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진정한 능동성과 큰 그림에서의 능동성을 찬양하는 것이다. 조금은 느슨해져도 좋다고 주절주절 대리인처럼 문장을 엮어내고 있다.


나는 키우는 강아지에게도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태도를 가르쳐 주고 싶어 했다. 이건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하루는 현관문을 활짝 연 뒤 "나가 빵돌아. 나가서 실컷 놀고 들어와"라고 했다. 워낙 산책을 좋아하고 집도 잘 찾는 동거인이기에 나가 놀고 싶을 때 놀고 들어오고 싶을 때 들어오는 능동적인 삶을 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난 이 동거인의 부인이나 남편이 아니고 부모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우린 철저히 사료를 주고 애교를 받는 금전적 관계다. 하지만 이 녀석은 마치 나가면 순식간에 금수저에서 흙수저로 추락하는 것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은 것 또한 이 친구의 능동적 사고이니 일단은 그쯤에서 합의했다.


하고 싶은 말은 명확하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능동적인 태도에 지나치게 몰입해 오히려 과몰입으로 묶여버릴 때도 있다는 거다. 뭐든 지나치면 독이다. 조금은 느슨해지고 그저 그렇게 몸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일 때도 필요하다. 그 행동은 어디 경찰서에 구속돼 있지 않은 한 자신이 행한 결과다.


금요일이라서 밑도 끝도 없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게 아니다. 한 박자 늦춰도 눈부신 의료 발전 때문에 100세 수명까지 많이도 남는다. 살아가는 삶은 지값 두께와 달리 너무도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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