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카이에서 얻어온 것들 2

머리카락은 길어도 잘 선다

by 반동희

이 글은 내 브런치에서 가장 관심을 많이 받은 <보라카이에서 얻어온 것들> 보완 문이다. (https://brunch.co.kr/@komsy1201/85)


보라카이에서 가장 아찔했던 기억을 풀어보려 한다. 친한 친구들한테는 술자리에서 몇 번이고 했던 얘기다. 지금 당장 지어낸 허풍이 아니라는 거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명확하다. 앞으로 만날 사람들마다 또 얘기하느니 그냥 이 글을 링크로 보내주자고 결심해서다. 결론을 던지자면 어쩌면 난 내 아지트와 같은 카페에 다시는 앉아 있지 못할 뻔했다. 실제로 내가 귀국하고 난 뒤 사흘쯤인가 뒤에 사고가 났으니 말이다.


보라카이 여행 중 경험한 밤에 대한 얘기다. 남자 혼자 여행 가면 밤에 정말 할 거 없다. 게다가 온갖 커플과 신혼부부가 끈적끈적한 분위기를 내뿜는 보라카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 첫째는 남들 눈 의식하지 않는 거였다. 그 뒤 각종 술집에서 맥주를 조금씩 홀짝이며 배회하는 '맥주 투어'를 해보자고 계획했다.


클럽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거리에서 "오빠, 마사지?" "오빠 혼자 왔어?"라며 당시 대통령보다 유창한 한국어로 은밀한 제안을 해 오는 현지 여성을 보고선 접었다.


첫째 날 숙소에서 작전을 하나 짰다. 이놈의 어정쩡하고 정서에 맞지도 않는 팁 문화를 피할 수 없으니 '주제를 선명하게 하자'라고 결정했다. 사흘 밤마다 특정 술집에서 꼭 특정 점원을 호명해 그 사람한테만 친절히 대하고 팁을 주기로 했다.


돈은 보라카이에서만큼이라도 걱정 없이 써보자고 계획하고 간 터였다. 적당히 밖에서도 클럽이 보이는 술집에 들어갔다. 해변에 파라솔로 펼쳐진 술집이었다. 가운데 자리를 턱 하니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곤 술에 취할수록 안 줘도 되는 팁까지 그 친구한테 서슴없이 찔러 넣었다.


"익스큐즈미, 아 드 라익 투 핫윙."

"잇츠 미, 아 워너 산미구엘."

"씨씨, 모어 비어. 쎄임 쎄임."

"헤이, 원 모어."

"헤이, 고고"


취기가 올라올수록 이런 식으로 말이 짧아졌다. 쓰고 보니 창피하다. 그래도 그때는 자신감이 넘쳤다. 지갑도 없이 지폐 뭉치를 그대로 탁자 위에 올려뒀다. 그리곤 맥주를 들이켜면서 점원이 올 때마다 두세 장씩 검지로 찍어 팁으로 줬다.


'코리안 팁 자판기'를 강제 구매한 이는 '제임스'라는 영어 이름을 쓰는 현지 남자 점원이었다. 1달러 팁도 충분하다는 한국인들의 말은 내 허세와 범벅돼 2~3달러로 쾌속 반등했다. 나중엔 내가 "헤이"라고 손만 들어도 다른 점원이 달려오기도 했다.


생각해보자. 맥주 한 병 가져다주는데 2달러 혹은 3달러를 막 뿌리는 놈이 어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난 다가오는 점원들을 모두 돌려세웠다. 줄곧 내 전략에 충실했다. 그때마다 "아 워너 톡 투 제임스"라고 말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만 해도 보라카이 현지 점원 대다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다. 이들 대부분 학비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멀리서 보라카이까지 일하러 온 이들이었다.


중간에 한 번은 혼혈로 보이는 예쁜 여자 점원이 다가왔다. 그러나 난 다시 "쏘리, 제임스 플리즈"라고 말했다. 그 여자 점원은 내 말에 입을 삐죽이며 돌아가기도 했는데 솔직히 너무 예뻐서 금방 다시 "헤이"라고 할 뻔했다. 그러나 난 찰나의 본능에 먹혀들지 않았으며 아무리 취했어도 훌륭한 지도자처럼 내 공약에 충실했다.


그런 예쁜 점원이 받는 2~3달러 팁에 대한 기쁨과 우리 제임스처럼 매우 평범하게 생긴 남자 점원이 받는 2~3달러 팁에 대한 기쁨의 가치는 다를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돈은 철저히 받는 사람 위주로 생각해야 한다.


실제로 나한테 퇴짜 맞은 점원들이 제임스한테 넌지시 뭐라고 얘기하는 걸 봤다. 아마도 그중엔 "제임스 몰랐는데 너 혹시 게이냐?" "너만 찾는 저 코리안 자판기 놈 귀에 귀걸이 했던 구멍 자국 있던데 쟤도 혹시 게이냐?" 같은 질문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난 절대 건방져 보이지는 않되 돈은 많은 품격 있는 부자 코스프레 좀 해보자고 다짐 또 다짐하며 제임스만 외쳐댔다.


제임스와 허니문이 그렇게 끝난 뒤 둘째 날 밤이 됐다. 다시 지폐를 반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지폐 뭉치는 무심한 듯 들고 다녀야 더 있어 보인다는 개똥철학을 믿었다. 이건 만고 불면의 진리이자 세계 공용 바디 랭귀지라고 혼자 키득거렸다.


우리의 평범남 제임스가 있는 술집 앞에 도착했다. 어제 그 예쁜 점원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난 보라카이 밤안개이자 이 구역 차도남 혹은 통속 드라마 속 재벌 2세 본부장처럼 연기했다. 남이 보면 절대 그렇지 않았겠지만 내가 그린 내 모습은 분명 그랬다.


예쁜 점원 앞에서 가볍게 한국식으로 목례 정도만 하고 어제 앉았던 자리가 비어 있어 그곳으로 갔다. 제임스는 부르기도 전에 메뉴판을 들고 왔다.


"땡스 제임스, 쎄임."


제임스와 나만의 은밀한 언어를 그에게 전한 뒤 3달러도 함께 건넸다. 부러움의 시선이 제임스에게 쏠리는 걸 재차 느꼈다. '저 자판기 오늘도 영업하네'라고 누군가 한 것 같은데 영어가 짧아 알아듣지 못했다.


산미구엘 7병 정도를 마셨으니 아마 제임스는 14달러에서 21달러 사이를 그날 밤 팁으로 챙겼을 거다. 아니다. 안주도 다 못 먹으면서 핫윙이랑 스파게티랑 샌드위치 비슷한 걸 시켰다. 안주 팁 9달러를 더해야 한다. 확실히 기억하는데 안주에는 무조건 3달러씩을 팁으로 줬다.


6병째를 중간쯤 먹었을 때였다. 사건의 발단이 꿈틀댔다.


바로 옆 테이블에 필리핀 현지인 여섯 명이 모였다. 2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남자보다는 소년에 가까웠다. 호리호리하고 몇은 화장을 한 것처럼 피부가 하얬다. 그들은 영어로 나한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살짝 취해 혀가 잘 돌아갔지만 애초 들어있는 '인풋'이 부족해 단문 위주로 말하는 자판기처럼 호구 조사에 응했다.


"너 한국인이야?"

"응, 케이팝 짱이야. 마더 파더 젠틀맨!"

"보라카이엔 혼자 왔어?"

"아니, 한 300명쯤 비행기 같이 탔는데 잠깐 헤어졌어."

"숙소도 혼자 써?"

"당근, 침대가 무려 두 개라 왔다 갔다 해."


대충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다. 중간엔 자기들끼리 현지어로 키득거렸다. 그 웃음이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보다는 우리 제임스가 나를 멀리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어서 난 절대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지만 나는 이성애자라는 걸 강조했다.


그렇게 취해갔다. 첫날과 다르게 호구조사까지 응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자정 가까이 됐을까? 슬슬 술집 간판 불이 꺼지고 거리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나는 보라카이 해변을 따라 알딸딸한 기분으로 거리를 누볐다. 그러다 맥도날드를 발견했다. 대로변에서 저 골목 안쪽으로 가는 길에 있었다.


지 버릇 한국 개한테도 못 주는데 보라카이 개에게 줬을 리 없었다. 술 먹으면 꼭 마지막에 햄버거 먹고 들어가 자는 못 살던 시절 버릇이 도졌다. 어둠을 헤치고 다니다가 그 어두침침한 골목을 지나 환한 맥도날드 문을 열어젖혔다.


한국과 달리 그 시간엔 매장에 사람이 없었다. 대신 키가 190cm는 훌쩍 넘어 보이는 흑인 친구 두 명이 내 뒤로 들어왔다. 둘은 컨버스 하이 운동화를 신고 농구 선수처럼 사뿐히 걸었다. 그들 목에 있는 헤드셋에선 힙합 음악이 쾅쾅 울렸다. 마치 맥도날드에서 틀어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덕분에 술이 조금 깼다.


나는 살짝 뒤로 빠져 그들이 먼저 주문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전봇대 친구들 두 명이 주문을 마치고 돌아서고 내 주문 차례가 됐다. "쿼터 치즈 파운드"라고 말했다. 사오정 점원이 못 알아들어서 손가락으로 점원 등 뒤 메뉴판 사진을 가리켰다. 순간 '팁을 줘야 하나?'하고 망설였지만 우리의 제임스 얼굴이 떠올랐다. 어디서 주워듣기론 프랜차이즈에선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서 기다렸다가 햄버거만 받아 챙겼다.


햄버거를 사뿐히 들고 매장 문 밖에 있는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쾅쾅 거리는 전봇대 청년 둘의 음악이 너무 시끄러웠고 그 와중에도 어두운 바다를 멀리서라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테라스에 앉아 장총을 차고 옆에 서 있는 경찰과 눈인사를 하기도 했다. 파란 제복의 폴리스맨도 웃었다. 제임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우린 그렇게 통했다.


온 거리가 어두웠으나 내겐 총을 찬 폴리스 친구가 있어서 든든했다. 흡사 경호원을 데리고 햄버거를 먹는 힙합 스타 기분이었다. 흑인 친구 두 명의 음악이 여전히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설명하자면 보라카이엔 모든 매장 입구마다 총을 찬 경찰이 지키고 있다. 내가 어둠을 살라먹고 간 맥도날드도 당연히 그들의 소중한 일자리였다.


햄버거를 반쯤 먹었을 때 문제가 고개를 쳐들었다.


저쪽 골목에서 아까 그 현지 청년들 사이에서 본 것 같은 한 명이 나를 흘끔거렸다. 내 기억엔 그 무리 중 가장 곱상하게 생겼고 머리를 무스인지 왁스인지 발라 위로 올려 꽃미남 인상이었는데 확실히 그 친구였다.


햄버거 한입에 그 친구와 눈 한번 마주치고 또 한입에 그 친구와 눈이 마주치길 세 번 반복했다. 나는 이제 제임스 구역에 있는 본부장 연기파 배우도 아니고 맥도날드에서 경호를 받으며 햄버거를 먹는 힙합 스타이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결국 햄버거를 내려놓고 다가갔다.


"나 쫓지 마. 왜 흘끗 거려?"

"......."

"그만 쳐다봐."


이런 말이 오고 갔다. 정확히 말하면 나만 떠들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햄버거를 들었다. 한입 두입 세입 쥐처럼 조금씩 아껴 베어 무는 데 또 그 친구가 박자에 맞춰 쳐다봤다.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난 이미 '스웩'이 절정에 달한 힙합 스타였다. 경찰 친구가 "와이?"하고 물었다. "노 프라블럼"했다. 다시 흘끔거리는 친구에게 당당하게 다가가 외쳤다.


"쳐다보지 마."

"......."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그 친구와 일직선상으로 그러니까 저쪽 해변에 덩치가 정말 산만하고 장발인 웬 남자가 나를 어둠 속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인상이 차갑고 눈빛이 서늘했다.


'총?!'


'젠장, 맥도날드 경찰 친구가 들고 있는 저런 합법적인 총이 아니라 주머니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권총!'

상상의 나래를 폈다.


지금이야 상상이라고 하지 그땐 진짜 팩트 99%처럼 생각됐다. 힙합 스타는 개뿔이고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술집에서 호구 조사할 때부터였나? 아니면 첫째 날 둘째 날 계속 제임스만 찾으며 호구 짓 할 때부터였나? 머릿속 테이프가 마구 돌았다. 일단 맥도날드 경찰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야, 제가 나 쫓아와. 뒤에 무서운 사람도 있는 것 같아. 같이 좀 가줘."

따발총처럼 안 되는 영어로 말을 뚝뚝 끊어했다. 경찰 친구의 말은 딱 한 마디였다.


"난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공무원이란 뭘까? 전 세계 공무원들의 영혼을 몽땅 빼앗아가는 글로벌 조직이라도 있나? 3초 정도 눈앞의 총구와 '굿 나잇!'하고 인사했을 때를 상상했다. 속으로 욕하고 또 욕을 했다.


답이 없었다. 전봇대 흑인 친구들이 나갈 때 같이 나갈까도 고민했는데 이 친구들은 언제 나갔는지 없었다. 내가 소년 뒤 해변에 숨어있는 서늘한 남자를 봤을 때 등 뒤로 지나갔나? 그래서 진짜 음악 소리가 안 들린 건가?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거지 주제에 제임스 상대로 자판기 놀이한 대가라 생각하고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맥도날드를 나서 골목길을 걸었다. 소년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가 나를 또렷이 쳐다봤다. 나도 그를 봤다.


'이런 게 덤비면 솔직히 원투 펀치로 날릴 수 있는데. 나 복싱에서 원투, 원투, 백, 원투 스텝도 배웠는데......'


그 순간 내 등이나 뒤통수엔 커다란 구멍이 뚫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래도 걸었다. 앞잡이 소년에게는 말은 걸지 않기로 했다. 자극할까 봐서다. 그렇다. 이미 한껏 쫄보가 됐다. 그냥 걸었다. 소년이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그와 평행으로 해변에서 덩치 큰 서늘한 남자가 당연히 따라왔다.


거리는 어두웠다. 아주 가끔 몇 명의 현지인이 나를 마주쳐 지나갔지만 방법은 없었다. 걷고 또 걸었다. 뛸까도 생각했는데 소년이 나를 붙잡고 뒤엉키다가 저 해변 남에게 덜미를 잡혀 같이 배를 타거나 소음기 달린 총에 구멍이 나는 장면이 떠올랐다. 걸었다. 그냥 걸었다.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 열차에에에에에"

"동구 밭 과수 원샷, 아카시아 꽃이 활짝 원샷!"


등 뒤에서 한국어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취한 아저씨 두 명의 목소리라는 걸 직감했다. 뒤를 돌았다. 마지막 찬스였다. 뛰었다. 그쪽으로 마구 뛰었다. 역주행을 한 것이다. 소년이 '어?' 하면서 쳐다봤다. 해변은 미처 못 봤는데 그 망할 자식의 반응도 비슷했을 거다.


흥과 멋을 아는 유구한 한반도 민족의 기분파 아저씨 두 명이 가까워졌다. 직접 보니 둘이 아닌 다섯 명이었다. 슬며시 그 무리 뒤쪽으로 가서 섰다. 그리곤 같이 다시 원래 내 숙소 방향으로 걸었다. 앞잡이 소년이 다시 뒤에서 따라왔다. 해변 스나이퍼도 여전히 따라붙었다.


"근데 우리 왜 다섯이 아니고 하나 더 있노?"

창피하게도 남행열차 아저씨가 눈치챘다.

"뭐꼬? 누구세요?"


동구 밭 아저씨도 갑자기 서울말을 쓰며 아카시아 향수를 뿌린 것처럼 친절하게 물어왔다.


나는 팩트와 상상을 더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것처럼 상황을 털어놨다. 물론 제임스 얘기는 하지 않았다.


간략하게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쫓아오지 말라고 했던 일, 그 이후 내 추측으론 총을 들고 있는 것 같은 덩치가 고용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경호원처럼 멀찍이서 따라온 일, 나는 지금 숙소를 가야 하는데 무서워서 호남선 남행열차 운행 소리를 듣고 합류한 일 등등만 전달했다.


"그래요? 갑시더."


동구 밭 아저씨가 내 숙소 앞 골목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진짜 해변 경호원이 총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는 일이고 일단 소년이랑 덩치가 미행하는 건 확실하니 저쪽까지 같이 가다가 부리나케 뛰라고 했다.


나는 광야에 헐떡이던 말이 뛰쳐나갔던 마구간을 찾은 것처럼 굳었던 다리가 풀리는 걸 느꼈다. 고맙다는 표시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남행열차 기관사와 동구 밭 부르주아 무리와 걸었다.


그리곤 숙소 골목에 다다라 "저 뛸게요"라고 말한 뒤 초등학교 운동회 때 좋아하는 여자 친구 앞에서 청군 마지막 주자로 바통을 받은 것처럼 밤공기를 가르며 뛰었다.


마지막 날은 숙소에서 조용히 캔맥주 먹고 잤다. 제임스 술집은 가지 않았다. 해가 지기 직전 맥도날드에 가서 "이 허수아비 xxx야"라고 조용히 한국말로 웃으며 어제 그 경찰 친구한테 인사만 했다. "유 파이어!"라고도 하고 싶었는데 관용을 베풀었다.


맥도날드 매장엔 들어가진 않았다. 경찰 친구가 "예스터데이" 어쩌고 한 것 같은데 이미 영혼 없는 초상화처럼 보여 조용히 무시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다. 사람들이 더럽다고 그렇게 사지 말라고 말렸던 세븐 망고를 다 먹었을 때쯤 뉴스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필리핀에서 한국인이 총기 사고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남행열차랑 동구 밭 노래가 귀에 맴돌았다. 골목에서 흘끔거리던 소년이랑 진짜 총이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일대일로 붙었을 때 절대 이길 수 없는 체급의 덩치도 생각났다. 팁 줄 때마다 환하게 웃던 제임스도 떠올랐고 미모의 혼혈 점원도 떠올랐다. 두 다리를 맥도날드에서 절대 움직일 수 없다고 해 내 마음속에서 해고된 경찰 친구와 어쩌면 나의 특급 도우미가 될 수 있었던 장신 흑인 여행객 두 명의 커플 빨간 컨버스 운동화도 떠올랐다.


'총기' 존재 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 추측이었지만 정황만으로도 다시 머리가 쭈뼛섰다. 나는 보라카이에서 까까머리가 아니어도 쭈뼛 설 수 있는 머리카락의 비밀을 또 다른 체험으로 얻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