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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Feb 02. 2019

새해 계획 따위는…

오래전 읽던 책을 꺼내 읽었다. 중간에 책갈피가 있었다. 2년 전 마카오 갈 때 탑승권이었다. 그랬다. 그때 나는 카페에서 문득 나 홀로 여행을 계획했다. 급히 갈 수 있는 곳이 마카오라고 결정했다. 순식간에 인터넷으로 티켓을 샀다. 가깝고 저렴했다. 만만한 곳이었다.

곧바로 도서관에 가서 가이드북을 빌렸다. 읽으면서 일정을 그렸다. 여기를 가고 저기를 찍고 음식은 이러저러한 것을 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비행기에 타서 읽었던 책에 티켓을 넣어둔 셈이었다. 뒤늦게 보니 그때의 기억이 밀려왔다.


그때의 나는 온갖 계획으로 삶을 꿰었다. 하루에 몇 분은 영어 공부를 하고 글은 늘 어느 주기로 쓰며 책은 약한 분야부터 읽는다는 식이었다. 한참 매일 해야 하는 마감 속에서 외부에 칼럼도 쓰고 책도 무진장 사들일 때였다. 정신없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녹초가 되어가는 순간 불현듯 마카오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계획에 계획이 더해지면서 마치 두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계획의 끝자락 속으로 질주하던 때였다.

당시 세운 계획을 헉헉대며 계속 달랐다면 아마도 지금쯤 내 일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아주 조금이었을 테고 지금 보니 나는 그 모든 계획을 달릴 체력과 능력이 되지 않았다. 욕망의 산물이었다.


돌아보면 모든 게 그랬다. 어렸을 때 내가 꿈꾼 30대 중반은 지금 내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 계획대로라면 요즘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아빠”하면서 달려오는 나하고 유전자만 같고 외모는 달라서 예쁜 내 아내의 딸이 있어야 했다. 가끔 주말에 축구를 같이하자고 졸라서 내가 졸린 눈을 비비며 운동장에 데리고 나가 인프런트 킥이나 인스텝 슈팅 정도는 가르치는 데 마침 나를 닮아서 실력이 쑥쑥 느는 ‘스포츠 키드’ 아들도 있어야 했다. 가끔 퇴근이 늦어 토끼 같은 가족들이 전부 자고 있는 날에는 지금의 빵돌이가 혼자 거실에서 나를 조용히 반겨 나는 빵돌이를 번쩍 안아 입 맞추고 대충 거실 바닥에서 같이 자야 했다. 아내는 매우 가정적인 데다가 예쁘기까지 한데 마침 나는 혼자 글밥으로 돈을 벌어도 우리 식구를 먹여 살릴 능력이 되어 지친 머리를 소파에 맞대면 스르륵 잠이 드는 그런 안락한 가정의 인원이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떤가. 이 정도면 만족하는 편이지만 계획했던 삶과는 거리가 있다. 곱씹어보면 계획은 늘 ‘판타지’였다. 마침내 판타지에 다다른 시점은 ‘날 것’ 그대로 좌충우돌이었다. 큰 줄기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줄기에 달린 이파리들은 형형색색 달랐다. 이런 점을 깨달은 후부터 큰 계획은 세우지만 작은 계획들은 잠재의식으로 치웠다.


마카오 티켓을 손에 넣은 후 얼마나 또 달라졌는가 했더니 역시나 좌충우돌이다. 그때는 기사와 칼럼에 묻혀 지냈고 그것만이 삶의 중추였다. 심지어 그 마카오 티켓을 쥐고 간 마카오마저 50년 만의 태풍에 뒤덮여 나는 속으로 엉엉 울다가 겨우 겨우 섬을 빠져나왔다. 태풍은 계획을 쓸어 갔고 허무맹랑했던 여행의 기억은 이곳 브런치에도 올린 적이 있다.


어쨌든 지금은 그렇지 않다. 타고난 오지랖이 발동해 눈앞에 책들만 봐도 장르 불문 내용 불문 뒤죽박죽이다. 이걸 분야별로 분리하는 건 애초에 포기했고 포기하니 역시 편해졌다. 이를테면 경제 책 옆에 시집이 있고 소설 옆에 심리학 책이 있고 재벌가를 탐구한 책 옆에 소소한 삶을 강조하는 책이 있는 그런 식이다.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서 계획은 더욱 멀어져 더 갈지자로 어딘가 걸어가는 형국이 되었다. 바야흐로 참을 수 없는 오지랖에 양식을 뿌려 ‘융복합’ 시대에 대응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가끔 방이 너무 정신없으면 1초 만에 정리할 수 있는 나만의 비법인 ‘방문 닫기’를 하며 사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들어오는 원고는 마다하지 않고 쓰는데 결국 크게 보면 예전의 계획대로 가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다.


쓰는 중에 둘러보니 <코스모스>가 보이는데 ‘모든 개인이 우주’라는 말을 좋아한다. 전 세계 인구가 75억 명을 넘었다. 저 말에 대입하면 최소 그만큼의 작은 우주가 지구에도 있는 셈이다. 우주란 단어는 또 얼마나 아득한가. 칼 세이건이 40년 전쯤 쓴 코스모스를 지금 봐도 단번에 전부를 이해하긴 어렵다.

거기서 또 우리가 얼마만큼의 새로운 우주를 이해하게 됐느냐고 물으면 이 또한 알 길이 없다. 가끔 유명한 과학자들이 우주의 원리를 얘기할 때면 도무지 인식이 어려워 또 다른 종교를 접하는 듯하다. 그러니 인간이 세운 계획이란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가. 그저 몇 개의 것밖에 세우지 못하고 자연 속에서 흘러가는 것만 잡기도 버거운 것이다.


새해라는 건 마치 새로운 우주를 접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수가 12월 31일을 넘어 12시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새해 인사를 빌고 여기저기 문자를 날린다. 그리곤 또다시 2월에 있는 ‘설날’이 되면 같은 일을 반복하고 삼삼오오 모여 명절을 쇤다. 일찍이 가족이란 무엇인가 경험하고 생각했던 내겐 한 편의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진다. 나약함의 상징이랄까.

시간은 둥글게 흘러 돌아오지 않고 일직선으로 흐른다. 올해 1월 1일은 작년 1월 1일과 같지 않으며 과거는 타임머신이란 게 가능한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게 개발되어 특정 좌표축을 찍지 않는 이상 접하지 못한 미래처럼 미지수일 뿐이다. 그사이에서 먼 계획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큰 줄기나 잡고 이리저리 부딪히며 가는 수밖에 없다.


인간도 결국 동물인데 동물은 하루하루 눈앞에 있는 상황에 대응하며 ‘생존’이라는 큰 계획만 부여잡고 간다. 우리 빵돌이가 딱 그렇다. 마침 마카오행 티켓이 꽂혀 있던 책은 <철학자와 늑대>였다. 본질적으로 인간인 철학자와 동물인 늑대는 다르지 않다. 인간이 그런 척을 할 뿐이다. 계획이란 것도 그런 척하는 도구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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