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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기어를 박으면 앞으로 나갈 수는 없잖아요

[학내 '총학생회장 논란?' 보도 그 이후] 편집위원 기영

이규상 씨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와 2차 가해를 사유로 무기정학 징계를 받아 학생 대표 자격이 정지되었다. 이에 대해 이규상 씨 본인이 직접 학내 커뮤니티를 통해 입장을 공유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학교 커뮤니티에는 학우들이 익명으로 여러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규상 씨는 인권·성평등센터(이하 성센)의 처분이 부당하다며 가처분 소송을 진행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규상 씨가 앞으로 총학생회장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는가? 이 모든 과정은 할 말이 떨어졌을 때 ‘아 우리 학교 총학생회장이~’로 시작하는 여느 술자리에서의  가십거리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학내 커뮤니티(에브리타임)에 올라온 학내 구성원들의 반응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는 단지 여론을 수합하여 정리하기 위함은 아니다. 또한 학내 커뮤니티에 올라온 의견들이 여론의 총합이라고 규정하는 것 역시 아니며 설령 해당 의견들이 다수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다수가 말하는 것이 늘 옳거나 한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바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학내 커뮤니티에 올라온 의견은 말 그대로 학내 커뮤니티를 사용하고, 거기에 익명으로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표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학내 구성원들의 의견일 뿐이다. 그렇지만 광범위한 학내 구성원들의 입장을 들을 마땅한 창구가 없는 상황에서 온라인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의견들은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때때로 해석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앞선 ≪고대문화≫ 봄호에서 성폭력의 문제를 처벌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사유하는 것이 우선적 가치임을 언급한 바 있다. 즉, 학내 구성원 각각은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는가 역시 사건의 일부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도 당신도 이 책임에서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이 사건이 그나마 ‘건설적으로’ 해결될 무한한 기회를 매 순간 놓쳐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시끄러운 것들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선을 그으면서도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여러 의견을 쏟아냈다. 이런 게시물과 댓글들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보였다면 과도한 곡해일까? 자질구레하게도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온 활자들에 굳이 매달리는 것은 우리는 도저히 이 사건의 제3자가 될 수 없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더불어 학내 구성원들이 익명으로 내비친 의견들 중에는 사실관계 자체가 왜곡된 경우도 다수 있었다.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기본적인 사실관계마저 손쉽게 곡해된다는 사실 자체도 이번 사건을 구성하는 문제 중 하나다. 그러니까 오해를 해버렸다기 보다 오해를 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성폭력 사건을 고발하면, 일단 피해자를 한 번 의심해보는 것이다. 일단 피해자를 의심하고 싶어지면 피해자가 낸 여러 주장이나 의견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여부는 귀에 들어가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학내 커뮤니티를 통해 분출된 주장을 큰 틀에서  가지로 정리하면서 ‘사실’과 ‘입장’을 감히 분리해 보았다. 우리는 흔히 사실은 객관적이라 생각하고 입장은 주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임금은 보상이다’와 ‘임금은 착취다’ 어떤 문장이 사실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가? 어떤 사실은 그 자체로 입장을 함의할 수밖에 없으며 입장은 필연적으로 특정 사실을 요구하게 되어버린다. 물론 이것이 세상에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으며 우리는 보편을 말할 수 없다는 상대주의 선언은 아니다. 다만 사실이라는 말을 쓸 때, 입장이라는 말을 쓸 때 서로를 침범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래의 ‘사실’과 ‘입장’은 어쩌면 입장들의 나열로만 보일 수도 있고 다른 의미에서 사실의 나열로만 읽힐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분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사실’ 항목에 들어가는 것은 반박이다. 학내 언론 등을 통하여 발표된 것임에도 확인하지 않은 채 쓴 의견에 대한 반박도 있고, 자신이 하는 말이 객관적인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입장들에 대한 반박도 있다. ‘입장’은 공동체적 문제 해결에 더욱 집중한 항목이다. 우리가 더 나아지기 위해서 추가로 생각해봐야 한다고 여기는 것들을 ‘입장’으로 명했다. 반박만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도 입장을 내라.


그림 설명 시작. 에브리타임 5월 2일 13시 11분 작성. ‘그리고 이거저거 말 할거없이 쌍방에서 제시한 근거들 다 공개하면 되잖아요’. 그림 설명 끝.

그림 설명 시작. 에브리타임 5월 1일 19시 38분. 제목. ‘난 이 정도면 피해자도 입장문 써야한다고 봄’. 본문. 2차가해라는 보호 속에 그만 안주해있고 나와서 어떻게 이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지 정도는 설명해줘야 한다고 봄. 2차가해라는 보호 속에 있으려면 피해자임이 명백해야 하고 그러려면 빼도박도 못할 증거가 있어서 가해자가 범행을 인정해야 한다고 봄. 근데 지금 상황은 가해자로 의심되는 총학생회장은 범행 사실을 일체 부인하고 있으며 당시 에타에서 보여줬던 증거들은 내가 보기에 총학이 유죄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 사건은 아직까지는 피해자-가해자 구도가 아니라 원고-피고 구도라고 봄. 따라서 원고인 피해호소인은 2차 가해라는 보호망 속에서 나와서 본인 입장 표명해주는 게 맞다고 봄. 그게 싫다면 우린 계속 총학생회장 입장문만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 피해호소인의 입장은 고려하고 싶어도 고려할 수가 없으므로 총학생회장이 무죄고 억울하게 신고당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음. 그림 설명 끝.


사실에 대하여

학내인권단체협의회에서 제작한 '총학생회장 사건 정리 문서'는 이미 공개되어 있는 상황이다. 해당 문서에서 피해자의 입장과 정황 증거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확인을 하면 되겠다. 35쪽 분량의 사건 정리 문서 확인이 힘들다면 해당 문서를 바탕으로 사건을 정리한 고대문화 147호의 「총학생회장 “논란”?」을 확인하라.


입장에 대하여: 2차가해라는 쟁점

피해자에게 증거와 정황 자료들을 요구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2차 가해’라는 개념에 자체에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는 학내 구성원들의 입장도 확인할 수 있다. 증거 등을 통하여 일의 잘잘못을 분명히 따질 필요가 있는데 ‘2차 가해’ 때문에 피해자의 입장을 들어볼 기회조차 뺏기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피해자의 입장과 각종 증거가 이미 공개되어 있다). 1차 가해가 있었는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2차 가해가 웬 말이냐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번번이 등장하는 ‘2차 가해’가 도대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온라인상에서 합의된 ‘2차 가해’의 정의는 피해자의 피해 사실에 말을 얹는 것 자체가 되어버린 거 같다. 본래 2차 가해라는 용어 이전에는 2차 피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었다. 2차 피해는 1차 피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차별주의와 잘못된 성 통념으로 인해 피해자가 마주하게 되는 부당한 일을 총칭한다. ‘피해’를 ‘가해’로 수정한 것은 성범죄에 있어 가해자보다 피해자의 자격을 먼저 따지는 풍토에 대한 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2차 가해는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성폭력이 다른 폭력 사건들과 무엇이 다른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다른 범죄들과 달리 성폭력에 있어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와 어떤 관계였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성관계는 해본 적이 있는지와 같이 피해자의 속성이 자주 호명된다. 혹은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왜 공적 영역으로 끌고 오냐며 노골적인 비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 사건의 경우에도 피해자와 이규상 씨가 과거 애인 관계였다는 점이 여러 번 언급된다. 뭐만 하면 다 성폭력이 되니 그냥 연애하지 말자는 어떤 댓글을 현실을 잘 담아낸 유머로 소비가 된다. 이는 성폭력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하는 보편적인 인식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2차 가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림 설명 시작. 에브리타임. 제목. ‘이정도면 총학생회장 출마 조건에 하나 추가해야함. 본문. ‘모쏠’. 그림 설명 끝.

그림 설명 시작. 에브리타임 5월 2일 1시 31분. 제목. ‘이래서 연애하지 말라는 거다.’. 본문. 연애해봤자 뭐함. 결국은 헤어지는 수순임. 결국 그저 자신의 모든 흑역사와 약점을 알고있는 사람을 지구상에 한명 더 만드는 것 뿐. 아무리 내가 고려대학교 학생회장이요 누구요 경기도지사요 누구요 연예인이요 누구요 해봤자 결국에 파국 뿐이라니까? 그림 설명 끝.


성폭력 피해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이런 말만 해도 다 2차 가해냐’고 말하는 식의 여론 형성은 이번 사건에만 국한된 반응은 아니다.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가 남성의 시각에서 조정되는 성별 권력관계가 단단히 자리 잡은 사회에서 당연하지만 2차 가해는 실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2차 가해라는 개념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해당 사건이 공적으로 논의되는 것을 막아왔던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여러 층위의 구조 속에서 산다. 그 구조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조를 재판에 세울 수는 없다. 구조를 재판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은유일 뿐이지,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런 구조가 너무나 명백히 보이는 사건들이 사회 규범마저 허용하지 않는 극단적인 폭력의 형태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사건들만이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성폭력 사건 역시 공정하고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유무죄 여부가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합리적인 절차를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개별적인 성폭력 사건은 어떤 동일한 구조를 공유한다. 2차 가해의 이름으로 피해자의 말만 전적으로 듣고 옹호하는 것은 실제로 피해자를 위한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성적 폭력을 해결해보지도 해결의 과정을 통하여 대안의 사회를 구성해보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피해자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역설적으로 피해자를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이자, 행위자, 판결자로 만들어 소외시킬 우려가 크다. 피해자를 소외시켜 사건을 ‘처리’한 경험은 성폭력을 ‘해결’하지 못한다. 피해와 가해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 피해자를 보호하거나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우리의 지향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② 피해자 진술이면 다?


그림 설명 시작. 에브리타임 5월 1일 17시 40분. 본문. 피해자의 진술만 있으면 바로 징계처분되네…맘에 안드는 남자 있으면 바로 담굴 수 있어서 좋겠다~ 그림 설명 끝.

[그림5]

에브리타임 5월 1일 17시 40분. 본문. 피해자의 진술만 있으면 바로 징계처분되네…맘에 안드는 남자 있으면 바로 담굴 수 있어서 좋겠다~ 그림 설명 끝.

[그림6]

에브리타임 5월 2일 14시 4분. 본문. 양쪽다 정확한 증거는 없고 정황상증거랑 진술밖에 없는거 아님??? 그런경우엔 성범죄쪽은 대부분은 피해자 위주로 흘러가더라. 그림 설명 끝.


사실에 대하여

성폭력의 기준은 성폭력의 행위자가 아닌 피해자다. ‘피해자 진술이면 다’가 아니라 피해자가 상황에 따라 느끼는 경험이 중요한 성폭력 여부의 중요한 지표라는 것이다. 성폭력의 기준은 가해자의 행위를 중심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집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행위는 폭력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설사 처음에 동의한 행위여도, ‘이제 오지 마라’라고 한 이후에도 계속 찾아온다면 그것은 폭력이 되는 것이다. 즉 가해자가 얼마나 가혹하고 말도 안 되는 행위를 했는지가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법원은 훨씬 성폭력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한국은 강간 사건의 성립 조건으로 폭행 혹은 협박을 동반한 강제력이 행사되어야 하는 최협의설을 채택하고 있다. 최협의설에 따르면 저항의 증거를 신체에 남길 정도로 강력하게 거부 의사를 표현했을 때만 강간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증거 중심으로 유죄 여부를 가리면 대부분의 사건은 ‘증거 불충분’이 된다. 성폭력 사건 대부분이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기 어려운데 증거 중심으로 유죄 여부를 가리면 대부분의 사건은 ‘증거 불충분’이 된다.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 됐고~ 증거나 내놓으라고.”라는 태도가 적절하지 않은 이유이다. 증거라는 말은 객관성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피해자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태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이번 사건으로 돌아와 보자. 고려대학교 인권성평등센터는 법원이 아니다. 최협의설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인권성평등센터를 포함한 여러 조직 내에 있는 자치 기구의 경우 피해자가 제시한 증거들이 신빙성 있는 증거로서 무죄보다는 유죄 쪽에 가깝다고 판단되면 징계 절차를 시작할 수 있다. 입증이 과정이 더욱 간단하다는 것이지 없다는 것도 아니며 당연하지만, 증명 책임이 가벼운 만큼 처벌 역시 법원보다 가볍다. 이번 무기정학 조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법원에서 처벌받는다면 해당 이력은 이후 취직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지속해서 불이익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학교라는 공동체 내에서 처분한 결과는 그 정도의 효과를 가지지 않는다. 법정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학이나 직장 내에서 취해지는 적절한 조치는 피해자가 해당 조직에 있으면서 견뎌야 하는 고통을 확연하게 줄어든다는 점에서 조치는 의의가 있다.


입장에 대하여: 무고죄를 먼저 의심하는 당신에게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를 호소할 때 늘 따라붙는 의심들이 있다. ‘한 남자 인생 나락으로 끌고 싶어 작정한 꽃뱀’이라는 수식어다. 물론 이는 합리적인 의심이다. 성폭력의 경우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정말로 무고일 수도 있지 않을까에 대해 의심할 수 있다. 근거를 바탕으로 사건의 실태를 파악하는 것은 무척 합리적인 태도이며 지향해야 할 바일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실태를 파악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은 공개된 것이 대부분이다.


꽃뱀과 무고죄를 두려워하는 당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조금은 솔직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사실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이 아니어서 그렇게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그래 어서 내가 가진 피해자에 대한 기준을 충족시켜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판단은 법원의 몫?


[그림7]

에브리타임 5월 1일 19시 41분. 본문. 난 걍 법원 판결 나올 때까지 조용히 있는게 맞다고 봄. 저번에 에타에서 난리났을때도 뭐 제대로된 의견이라기보단 조롱글만 넘쳐나서ㅋㅋ 우리가 왈가왈부할 문제도 아니고..알아서 하겠지. 5월 1일 20시 30분 작성. 본문. 더 이상 제3자가 뭐라 말하고 요구할 스케일이 아님. 5월 1일 19시 41분 작성. 난 저 ‘2차가해’라는 말 ㅈㄴ마음에 안든다. 1차가해가 있었음을 전제하고 그에 대한 합리적 의문 제기, 반론,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변론마저 원천차다함ㅋㅋ심지어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란 단어도 아무튼 2차가해 취급할듯. 그림 설명 끝.


사실에 대하여

재판 관련 부분에 대한 혼란이 가장 많았다. 사실 학내 구성원들이 혼란을 겪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학생 자치의 대의를 내세우며 ‘소송’이란 말을 남발한 이규상 씨 때문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피해자: 처음부터 이번 사건을 형법 절차를 통해 해결하고 싶지 않았다(성폭력 사건 고발의 목표가 언제나 가해자의 형법상 처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 이규상 씨의 가해 사실을 고려했을 때 피해자는 대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총학생회장으로 이규상 씨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바란 것은 사과와 반성, 사퇴였으며, 첫 고발은 이규상 씨가 속했던 선본 내에서만 이루어졌다. 피해자가 제공했던 초기의 기회를 학교 커뮤니티를 이용하며 적극적으로 거부했던 것은 이규상 씨 본인이었다. 피해자는 성센에 자신의 피해사실을 신고한다.

성센: 피해자의 신고를 접수한 후 내부 절차대로 판단을 내렸다.

이규상: 성센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의 자치를 막는 학교의 횡포로 성센의 처분을 이해한다. 이에 가처분 소송을 성센을 상대로 제기한다. 그 후 패소했다.


요약하자면 일련의 과정에서 ‘재판 갈 일’은 오직 이규상 씨가 성센을 대상으로 했던 가처분 소송밖에 없다. 그리고 가처분 소송은 학교의 행정 절차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지, 이것이 피해자와 이규상 씨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어떤 법적인 판단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가처분 소송을 패소하기도 하였으나 만일에 승소했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가해 사실을 없던 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학내 구성원이 이규상 씨가 계속 언급하는 ‘소송’이 도대체 무엇인지조차 헛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승소’라는 말만 듣고 피해자가 총학생회장 억울하게 만들었다고 판단해버렸을 가능성은 있다.


입장에 대하여: 공동체적 해결

애초에 피해자가 사건 초기 총학생회 선거본부에만 입장문을 공유하고 사퇴를 요구한 것은 피해자가 고발을 통해 바란 것이 이규상 씨의 처벌만은 아니었다는 것의 증거일 것이다. 성폭력의 해결 과정에서 형법상의 조치는 필요할 수는 있으나 해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거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보통 세 가지 층위의 접근이 필요하다. 바로 법적 처벌, 사회 규범의 변화, 개인의 치유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성폭력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였을 때 전자, 법적 처벌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앞서 서술한 것처럼 대부분의 문제는 법적 소송까지 가기 어렵다. 그럼에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 문제 자체가 없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 무엇보다 법적 처벌의 한계는 그 뒤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이번 학내 커뮤니티 입장을 정리하면서 반박에 해당하는 사실만 쭉 적시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물론 응당한 법적 처벌은 중요하다. 그것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필요하다기보다 우리가 사는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사회 규범의 변화와 개인의 치유에 대하여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들은 법원이 대신해주지 않는다. 사회 규범의 변화는 공동체적 변화를 말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사회 규범에 제약받으며 살지만 동시에 책임을 지는 주체들이다. 특정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개별적인 비극이 아닌 구조와 연관 지어 사고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다. 개인의 치유 역시 가해자가 얼마나 큰 처벌을 받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단지 피해로만 규정되는 사람도 그렇게 규정되어도 되는 사람은 아니지만, 피해 사실 자체는 때때로 그를 괴롭게 할 수 있다. 이런 고통을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

 

마치며: 저기… 앞으로 나가실 때는 중립기어를 풀어야 해요

학내 구성원들은 단지 떨어지는 판단을 기다리는 사람들일 뿐인가. 성폭력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피해자를 고통에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고려대학교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합리적인 판단자들로서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영향 미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중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건에 대하여 우리는 각자의 입장을 갖는다. 자신의 입장의 다수에 속하는 입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혹은 현재 사회체제 내에서 수용 가능한 입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우리는 각자의 입장을 가지며 살아가며 때로는 입장 없음이 입장 있음 자체보다도 더 강력한 입장 표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입장이 없다는 것 자체도 자신이 이 사건에 대해 별도로 입장을 가질 필요 없다는 것을 판단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선호 및 기호의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자신이 놓인 사회경제적 지위의 영향일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주관적이므로 공통의 입장이나 지식을 쌓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 경도된 자기 세계에서 사는 개인들에게 그것을 합의해 나가고 정립해 나가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올해 3월 운전면허증을 땄다. 면허 시험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찬양해 마지않던 중립 기어를 처음 박아봤다. 빨간불에 정차 시 중립 기어를 내리지 않으면 감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록 불이 다시 켜졌을 때 중립 기어를 다시 올리지 않아도 감점이었다.


명확하지 않은 세상에서 입장을 세우고 사는 일은 어쩌면 피곤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판단을 유보한다는 의미에서의 중립 기어는 한편으로 이해가 된다. 빨간불이 켜지면 중립 기어를 내려야 하는 것처럼. 그런데 중립 기어만 내리면 영원히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신호등에 빨간불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사는 것은 가볍다기보다 외로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자신을 구성하는 사람들이니까. 이규상 씨를 둘러싼 이번 사건이 잊힐 것을 안다. 그런데 그래도 그러지 말자고 말해야겠다. 우리 같이 앞으로 나아가자. 우리가 나아갈 세계는 목적지가 있다기보다 매 순간 기어를 열심히 조종해서 다다라야 하는 것이니까.


편집위원 기영 / 7191zero@gmail.com


참고문헌

단행본

권김현영 외(2018).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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