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편집장 은지, 편집위원 윤석, 편집위원 민상
2023년 11월, 넥슨의 게임 ‘메이플스토리’에서 촉발된 ‘손가락 모양 논란’이 한동안 인터넷을 뒤덮었다. 하청업체가 캐릭터 리마스터 영상에 남성의 성기 사이즈를 조롱하는 기호를 의도적으로 원화에 숨겨넣었다는 주장이 시작이었다. 남성 게이머들은 영상에 참여한 여성 원화가가 과거 ‘은근슬쩍 스리슬쩍 페미 계속해줄게’라고 작성한 트윗을 발굴했다. 해당 영상의 외주제작업체인 ‘스튜디오 뿌리’는 해당 원화가가 퇴사했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올려 남초 커뮤니티의 여론을 잠재우고자 했지만, 계속되는 악성민원에 원청업체 넥슨의 갑질이 더해지면서, 문제는 게임업계의 빈약한 노동권과 원청-하청의 권력관계로까지 확산됐다.
사실 게임업계에서의 ‘사상검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6년 김자연 성우가 ‘남성 혐오’ 논란으로 교체당한 사건부터 이번 넥슨 사태까지, 논란을 확산시키는 남초 커뮤니티의 전략과 게임업계의 소비자 중심적(?) 피드백은 긴밀하고 정확하게 맞물려있다. 문제가 된 집게손가락 모양은 2015년 개설되어 2017년 폐쇄된 래디컬페미니즘 커뮤니티 ‘메갈리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남초 게이머들이 남성혐오의 증거로 삼는 원화가의 트윗에는 트위터코리아의 페미니즘 관련 트윗 검열을 비판하는 내용만이 있고, 여기서 메갈리아의 커뮤니티 문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남성 게이머들은 수많은 하위집합이 느슨하게 뭉친 ‘페미(니즘)’를 곧장 악마화된 특정 커뮤니티와 동일시하며 적극적으로 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커뮤니티발 음모론은 하나의 닫힌 합리화 체계를 형성한다. 오픈 위키인 ‘나무위키’에 넥슨을 비판적으로 보도한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기사를 ‘조작 기사’라고 기술하는 한편, 여타 시위보다 자본력이 우선시되는 ‘트럭 시위’의 방식으로 넥슨과 하청업체를 동시에 압박하는 식이다. 이곳에 반론이 설 자리는 없다. 페미니즘을 집게손가락 모양과 메갈리아라는 특정한 기호와 연결시키는 비약이 이 체계의 지반을 불안하게 흔들고 있지만, 그들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전략적인 무시는 남초 커뮤니티가 소비자로서의 집합력을 바탕으로 행하는 ‘백래시’의 주요한 전략 중 하나다. 넥슨을 비판한 여성민우회에 남초 유저들이 가한 ‘린치’는, 각종 남성혐오 논란이 실은 페미니즘이 제안하는 모든 진보적인 의제를 전적으로 거부하기 위한 몸부림임을 보여준다. 이번 인터넷에서의 ‘확전’은 공론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을 뿐,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다. 이 사건이 심화시켰다고 여겨지는 ‘젠더 갈등’은 허상에 불과하다. 페미니스트인 것을 드러낸 여성 노동자에게 가해진 건조한 폭력과 한층 더 위축되고 폐쇄적으로 변한 게이머 문화만을 남겼다. 이곳에서 승리자는 하청업체에 대한 주도권과 하드코어 유저들의 지지를 다진 원청업체 넥슨뿐이었다.
편집위원 민상 | hitch9662@gmail.com
주52시간제가 완화되려 하고 있다. 주당 정규 노동 40시간에 연장근로 최대 12시간을 상정한 정규 노동 체제가 ‘노동유연화’의 미명 아래 제도적으로도 사라지려는 것이다. 현 정권 하 노동시간 논의는 윤석열 당시 후보의 ‘주 120시간’ 발언과 뒤를 이은 갈팡질팡에서 시작했다. 논의는 2023년 11월 13일 연장근로 단위를 주에서 월, 분기, 반기, 연 등으로 유연화하면서 다시 불붙었다. 이에 따르면 노동시간은 최대 주69시간까지 가능해진다.
이에 호응하듯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연장근로 계산 식을 주당 총 12시간을 넘지 않으면 합법이라고 판례를 남겼다. 기존 하루당 초과 노동 시간을 주5일에 비추어 계산하던 것을 뒤집은 것이다. 이로서 하루 단위 집중 노동이 가능해졌으니, 극단적으로는 1주간 고용 없이 24시간 내내 사업장에 있는 것 또한 일 21.5시간[1] × 2일로 가능해진다.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노조 드라마스태프지부는 이미 하루 13시간, 주 4일을 일하고 있다며 격하게 반발했다. 방송 일정에 따라 초과 노동이 반강제되는 방송 현장에서 폭언과 성희롱에 맞서야 한 이들에게, 이번 판결은 그야말로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었다. 2024년 1월 22일, 정부는 연장근로 기준을 주 단위로 변경했다.
현재 논의는 업종별 유연화와 기회발전특구 등으로 물러섰다. 특정 업종과 지역자치단체 등에서 안전 장치를 해제할 수 있도록 예외 조항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특구로 선정되면 모든 규제가 전폭적으로 완화되고 지정 규제만 남길 수 있다. 어느 직종의 누가 얼마만큼 찬성을 하던지 그만큼 산업재해가 증가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IT업계에 만연한 ‘크런치 모드’가 개발자들의 심장 질환 및 과로사의 원인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과로해서 이익을 볼 수 있다면 ‘누가’ 이익을 보는지는 중요치 않아진다.
하루 8시간 주 40시간 노동을 위해 몸을 불사른 역사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도 출근도 퇴근도 하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일자리에 갇혀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장시간 노동이 합법화되어 아예 정당화되는지의 여부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이다. 6411 버스의 승객들이 노회찬을 아주 잘 알고 있듯이, 스스로 노동자로 불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이들 마저도 전태일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집위원 윤석 | jeongyunseok@jinbo.net
[1] 24시간에서 8시간마다 휴게시간 2시간과 연장근로 휴게시간 30분 제외.
2023년 12월 1일, 윤석열 대통령은 노조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법안명의 ‘노란 봉투’라는 상징이 만들어진 지 10년 만이다. 노란봉투법은 실질적 노동 계약을 포괄하도록 단체교섭 대상을 원청으로 확대하고, 파업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현행 법률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형태근로노동자를 보호하고,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노란봉투법의 이름은 2009년 쌍용차 파업에 참여한 해고 노동자들에게 47억원의 배상금을 물린 데에 항의하며 노란 봉투에 4만 7천원씩을 보낸 데에서 유래되었다. 은수미(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2015년에 첫 대표 발의를 한 후로, 노란봉투법은 발의와 폐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근 10년을 국회에서 표류했다. 처음에는 합법파업과 불법파업이 구분된다는 이유로, 다음은 의석수가 과반이 안 된다는 이유로, 마지막으로 법률의 원칙을 흔드는 특례조항들이 많다는 이유였다. 민주당과 정의당이 각각 노란봉투법 개정안을 내왔으나, 노란봉투법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통과되지 못했다. ‘여론을 만들어 오라’며 개정이 미뤄진 가운데, 대우조선해양은 “이대로 살 순 없지 않냐”며 파업한 하청 노조를 상대로 470억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쌍용차 파업 배상 청구액의 10배였다.
2023년 11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드디어 노란봉투법이 통과됐다. 10년 전 노란 봉투를 처음 보낸 시민 배춘환 씨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이 법이 없는 동안 죽어나간 많은 인생들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과 함께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아달라는’ 당부였다.
즉각 거부권이 돌아왔다. 당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국내에서는 노사분규가 파업이 아니라 파괴”라며 경제를 살리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줄 것을 공식 건의했다. 정부는 노란봉투법이 교섭 당사자와 파업 대상을를 ‘무리하게’ 확대하고 민사 원칙에 예외를 만든다고 말했다. 여론과 절차를 운위하던 민주당 시절의 논리와 다르지 않았다.
한편, 노란봉투법은 거부됐지만 1월 24일, 2심 법원은 원청기업과 하청노조 간의 단체교섭을 인정했다. CJ 대한통운이 택배기사들의 실질적 사용자인 만큼, “근로조건 등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자”도 단체교섭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노란봉투법의 입법 필요성을 드러내는 판례가 될 수 있다. 노란봉투법의 한계를 넘은 수많은 판본과 논의들을 다시 생각하고 준비할 때이다.
편집위원 윤석 | jeongyunseok@jinbo.net
편집장 은지 | choeej.eu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