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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 편집장 은지

‘모르자’, 라는 말이 입에 붙었습니다.

 

만약-과 설마- 로 시작하는 말들에 대한 장난스러운 방어로 입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 이내 현재형 말들에까지 붙어버린 겁니다. ‘설마 레퍼런스 조사를 안 했을까?’ (아니겠지, 그럼 왜? 모르자), ‘만약 머리 길이가 달랐다면 달랐을까?’ (그랬어도.. 모르자), 그리고 아홉 번의 거부에 ‘그럼 그렇지’하는 체념이 튀어나오며 (모르자).

 

세상이 눈앞에 들이미는 것들에 대해서도 모르자고 스스로를 회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르겠다’나 ‘몰라’도 아닙니다. 입에서 생겨나 입술만 통과해 나왔던 말은 어느새 목 아래 깊이 잠겨 기회만 노리며 옴짝달싹하고 있습니다. 반쯤 진심인 단어로 자리 잡은 겁니다.

 

이 위험한 회유는 실은 모르고 싶다는 희망에 가깝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욱 모르자, 라는 말이 튀어 오르니까요. 이쯤 되면 눈치채셨겠지만 모르자, 의 목적어는 특정한 사실의 존재라기보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의미와 조심성입니다.

 

이 목적어를 ‘안다’ 혹은 ‘모른다’는 것은 모순 없이 한 선상에 존재합니다. 얼마나 알고 모르는지에 따라 우리는 ‘앎’과 ‘모름’의 수직선에 자리하니까요. 그렇다면 ‘앎’과 모순되는 항에 ‘비(非) 앎’을 놓고, ‘모름’과 모순되는 항에 ‘비(非) 모름’을 놓을 수 있습니다. ‘비(非)’가 부정하는 의미는 다양할 수 있겠으나, ‘모르자’라는 청유형에 담긴 의지를 고려한다면 ‘비(非)’를 의지 부정의 기호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면 ‘비(非) 앎’은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이 되고 ‘비(非) 모름’은 ‘모를 의지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비(非) 앎’과 ‘비(非) 모름’ 또한 ‘앎’과 ‘모름’의 관계처럼 연속적이겠죠.

 

모르자, 는 상태는 어디에 위치할까요. ‘모르고 싶다’가 ‘알 의지가 없다’로 등치되지는 않으니 ‘비(非) 앎’은 아니겠지만, 부끄럽게도 그 언저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떠한 일에 대해 알게 되면서 고민하고 조심하는 수고로부터 도망치고 싶으니 말입니다.

 

‘비(非) 앎’을 비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들과 나는 하나의 선상에 있고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결’이 다를 수는 있겠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그럼에도 경계합니다. 조금 모를 수는 있더라도 알아가는 것과 모순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무엇보다 알아갈 의지 없는 선량한 안일함으로 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

 

무엇에 어디까지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얼마나 서술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용기를 가늠해 봅니다. 글과 서술의 재현을 책임져야만 하는 용기- 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장황한 오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용기 없이 모르자며 편히 밟고 지나간 징검다리들은 평평한 뒤통수로, 납작해진 얼굴은 고개를 듭니다.

 

모르자, 대충 내뱉은 뒤 암담함에 기사와 인터넷을 뒤적거렸던 행동이 떠오릅니다.

 

다시금 생각해 보니 ‘모르자’며 내비친 의지는 ‘비(非) 앎’으로 다가서는 길에 작용한 척력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입으로는 알고 싶지 않다며 툴툴대며 힘껏 그 말을 밀어내야겠습니다.



편집장 은지 | choeej.eu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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